第1章
혼례 시각까지는 이제 한 식경도 남지 않았다.
임지헌이 마침내 내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하온아, 데리러 왔다."
방 안 가득 모인 친척들이 곧장 떠들썩해졌다.
"신랑이 늦었으니 술을 벌로 받아야지!"
"그만들 하십시오. 혼례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서 신부를 가마에 태워야 합니다!"
막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으려던 찰나, 등 뒤에서 나의 시집길을 배웅하러 왔던 서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에 그린 꽃무늬가 번졌으니 조금 손봐야겠습니다."
나는 몸을 굳혔으나, 임지헌은 도리어 손을 거두었다.
"그래. 급할 것 없다."
서민주는 화장함을 뒤적이며 나를 향해 웃었다.
"하온아, 근심 말거라. 이내 끝내마."
"다 네 혼례를 빛내기 위해서다."
그러고는 임지헌에게 동경을 내밀었다.
"이것을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임지헌은 아무렇지 않게 동경을 받아 들었다.
방 안에 감돌던 소란이 문득 잦아들었다.
어머니의 낯빛은 조금씩 창백해졌고, 나는 창가에 놓인 물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세자 저하."
"관상감에서 정한 출발 시각은 진시 삼각입니다."
"지금 나서시면 제때 맞춰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지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고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러느냐."
"내가 이미 왔고, 혼서도 오갔으며, 육례까지 모두 갖추었거늘 설마 혼례를 그르치기라도 하겠느냐?"
나는 임지헌의 손에 들린 화장함을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어젯밤, 누군가 내 규방에 숨어들어 오늘 나를 데리러 와 혼례를 깨겠다면 그를 따라나설 것인지 물었다.
그때 나는 거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었다.
제1화
물시계가 또 한 칸 내려앉았다.
혼례 준비를 돕던 시녀가 초조한 낯으로 말했다.
"세자 저하, 이제 한 식경도 남지 않았습니다."
"신부께서는 집을 나서기 전에 어른들께 작별을 올리고, 불화로를 넘어 가마에도 오르셔야 합니다."
"더 늦으면 정해진 시각을 맞추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임지헌은 물시계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알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를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동경을 마주한 채 미간의 꽃무늬를 다시 그리고 있는 서민주를 보고 있었다.
서민주는 가는 붓으로 미간을 두어 번 더 다듬더니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왼쪽이 오른쪽보다 조금 높구나."
외숙모가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임 세자, 오늘 혼례를 치를 이는 그대와 하온입니다."
"민주는 하온이의 시집길을 함께할 벗일 뿐이니, 한 사람이 빠진다고 예가 어그러질 리 없지 않겠습니까."
"하온이를 데리고 먼저 나서십시오. 민주는 뒤따라오면 됩니다."
서민주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외숙모님께서는 제가 거추장스럽다는 말씀이십니까?"
"저와 하온이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벗입니다."
"하온이가 시집가는 날인데, 혹 하온이에게 누가 될까 하여 치장을 단정히 하려던 것뿐입니다."
"헌데 어른들 말씀을 듣고 있자니, 제가 일부러 좋은 시각을 늦추려 드는 사람처럼 여겨질까 두렵습니다."
임지헌의 얼굴빛이 이내 싸늘해졌다.
"외숙모님, 민주의 화장을 고치라 한 이는 접니다."
"불만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어찌 처자 하나를 이리 몰아세우십니까?"
외숙모는 말문이 막혔고, 어머니의 낯빛도 한층 더 창백해졌지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지난 세월, 임지헌은 늘 그러했다.
정월 대보름날, 우리는 함께 도성 거리를 거닐기로 약조했으나 서민주가 놀잇배에서 크게 놀랐다는 소식이 들리자, 임지헌은 나를 두고 그 길로 서민주에게 달려가 밤이 깊도록 곁을 지키다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내 계례를 올리던 날에도 배정무는 나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복을 빌어주겠다고 약조했지만 서민주가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 한마디에 서민주의 집에서 밤을 새웠다.
혼례복을 입어 보던 날도 다르지 않았다.
서민주가 발목을 살짝 삐었을 뿐인데도 그는 뜰을 가득 메운 몸종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업어 곁채로 데려갔다.
나라고 묻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서민주는 내 팔을 다정히 붙잡고,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하온아,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운 벗이지 않느냐."
"지헌 오라버니도 늘 나를 친누이처럼 여기셨고."
제2화
"어찌 우리를 의심하느냐."
임지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타일렀다.
"민주는 어릴 적부터 친오라비가 없었으니, 내게 조금 의지할 뿐이다."
"성정이 곧고 악의도 없으니, 매사 그리 따지지 말거라."
전에는 나도 믿었다.
하지만 혼례복을 입은 오늘, 서민주는 미간의 꽃무늬가 비뚤어졌다는 말 한마디로 온 친척을 붙들어 두었다.
더 우스운 것은 임지헌이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조모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임 세자, 하온이가 시집가는 일은 우리 집안의 큰일이다."
"온 집안이 인시부터 일어나 채비한 것도 정해진 시각을 맞추고자 함이었지."
"젊은이들이 신명을 공경하지 않는다 해도, 두 가문의 체면은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임지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민주가 먼저 붓을 내려놓았다.
"조모님, 정한 때가 중요한 줄은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끌려던 것은 아닙니다."
서민주는 내게 시선을 돌려 부드럽게 말했다.
"하온아, 어서 조모님을 달래 보아라."
"큰 경삿날에 어찌 이리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느냐."
임지헌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하온아. 민주는 화장을 조금 고칠 뿐이다."
"오늘 이리 많은 손님이 와 계신데, 모두가 난처해지게 하지 말거라."
나는 잠시 멍하니 임지헌을 바라보았다.
"제가 소란을 피운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목소리에는 못마땅함이 묻어났다.
"민주는 그저 단정히 꾸미고자 할 뿐이다."
"네가 하필 이때 나가라며 그 아이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 소란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나는 헛웃음이 났다.
온 집안을 붙들어 두고 꽃무늬를 고치는 일은 소란이 아니었고, 내가 시집갈 때를 일깨우는 일은 철없는 짓이 되었다.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집사가 급히 들어섰다.
"대감님, 마님. 신랑 측 행렬이 이미 대문 앞에 늘어서 있습니다."
"악대와 꽃가마, 복돈을 뿌릴 이들까지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지체하면 거리의 행렬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나는 임지헌을 바라보았다.
"세자 저하."
"진시 삼각, 저는 반드시 집을 나서야 합니다."
임지헌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서민주가 낮게 탄식했다.
"이런."
그녀는 동경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쓴 연지 빛이 잘못되었어."
"오늘은 하온이의 큰 경삿날인데, 검붉은 꽃무늬를 그릴 수는 없지."
"진 붉은빛이 더 길해."
서민주는 물에 적신 비단 수건으로 방금 그린 꽃무늬를 조금씩 지워 냈다.
어머니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민주야!"
"네가 참으로 하온이를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함께 나서야 하지, 더는 시각을 어겨서는 아니 된다."
서민주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주머님, 저는 하온이를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오늘 도성의 귀한 댁 부인들이 모두 잔치에 오실 텐데, 제 차림이 흐트러져 있으면 사람들이 구씨 가문이 예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큰외숙부가 차갑게 말했다.
"온 집안의 손님을 네 하나 때문에 기다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무례한 일이다."
서민주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큰외숙부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큰외숙부님께서도 제가 일부러 하온의 혼사를 망치려 한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임지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서민주의 앞을 막아섰다.
"그만들 하십시오!"
"민주는 하온과 함께 단정히 시집길에 나서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찌 그리 악의로만 헤아리십니까?"
큰외숙부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어머니는 임지헌을 바라보며 깊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아픔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물시계에서는 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졌다.
제3화
시녀가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
"혼례 시각까지 반각도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임지헌을 바라보았다.
"세자 저하, 들으셨습니까?"
"혹 혼례 시각은 중요치 않다 여기시는 겁니까?"
임지헌은 단호히 말했다.
"네가 내게 시집오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흔들렸을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처구니없었다.
그는 내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혼서와 예물이 오간 이상 내가 임지헌에게 시집갈 일은 이미 정해졌다고 여길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기다리고 서러움을 삼키며 구씨 가문의 체면이 깎이는 일쯤은 상관없었다.
서민주는 마침내 알맞은 연지를 골랐다.
그러나 가는 붓으로 미간의 꽃무늬를 반쯤 그리다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빛이 너무 짙구나."
"지우고 다시 그려야겠어."
어머니가 분을 이기지 못해 휘청였다.
"서민주, 오늘 혼례를 치를 이는 하온이지 네가 아니다!"
서민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님, 저도 잘 압니다."
"그러하기에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녀는 내게 물었다.
"하온아, 네 생각도 그러하지?"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내 침묵에 익숙했다.
내가 함께 자란 정을 외면하지 못하고, 임지헌은 제 편을 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미간의 꽃무늬를 다시 지웠다.
"그만 재촉하십시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번에는 제대로 그리겠습니다."
나는 임지헌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지금 저와 함께 나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곳에 남아 서민주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임지헌의 낯빛이 굳었다.
"하필 오늘 나더러 선택하라는 것이냐?"
"민주는 네 오랜 벗이기도 하고, 내 의누이이기도 하다."
"그저 화장을 고치는 일인데, 어찌 그리 못마땅해하느냐?"
서민주는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었다.
"하온아, 오늘 네 마음이 조급한 줄은 안다."
"그렇다고 모든 화를 내게 쏟아서는 아니 되지."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본 채 담담히 말했다.
"좋다."
"천천히 그리거라. 더는 재촉하지 않겠다."
"다만 진시 삼각에는 반드시 집을 나설 것이다."
물시계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아버지가 앞마당에서 급히 들어왔다.
짙은 붉은 혼례복 차림이었으나, 낯빛은 무서울 만큼 어두웠다.
"어찌 아직 나서지 않는 것이냐?"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사촌 오라버니가 싸늘하게 웃었다.
"서민주 아씨께서 미간의 꽃무늬를 아직 다 고치지 못하셨답니다."
"신랑께서 안쓰러워하셔서, 모두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임지헌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하온이를 기다리게 하겠다는 것이냐?"
임지헌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장인어른, 별일 아닙니다."
"누가 네 장인이냐!"
아버지가 호통치자 방 안이 삽시에 조용해졌다.
임지헌의 낯빛이 굳었다.
아버지는 창가의 물시계를 가리켰다.
"진시 삼각은 한 달 전 두 가문이 정한, 하온이가 집을 나설 혼례 시각이다."
"혼례 행렬과 꽃가마, 하객과 잔치까지 모두 그 시각에 맞춰 준비했다."
"그런데 다른 여인의 화장 하나 때문에, 내 딸을 혼례복 차림으로 온 친척 앞에서 기다리게 하겠다는 것이냐?"
임지헌이 낮게 말했다.
"제가 하온이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민주는 하온이의 가장 가까운 벗이니, 오늘 같은 날 모두가 체면을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4화
"체면이라?"
"신부는 곁에 세워 두고, 신랑 될 사람은 다른 여인의 화장함을 들어 주는 것이 임씨 가문의 체면이더냐?"
"얼굴의 꽃무늬 하나 때문에 구씨 가문을 도성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자네 체면이고?"
임지헌은 대답하지 못하자 서민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저씨, 지헌 오라버니를 그리 탓하지 마세요."
"시간을 끈 건 저이니, 제 잘못입니다."
"저도 하온의 혼사가 흠 없이 치러지길 바랐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더 말하려 하자, 나는 소매를 붙잡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늘 강직하던 아버지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하온아..."
나는 옅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시 삼각에는 집을 나서겠습니다."
임지헌의 낯빛이 달라졌다.
"하온아,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민주가 아직 채비를 마치지 못했는데, 어찌 먼저 나서겠다는 것이냐?"
내가 대답하지 않자 임지헌은 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두 가문의 손님이 모두 기다리고 있고, 도성 사람들 또한 오늘이 너와 나의 혼례 날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네 혼사를 망치겠다고?"
"우리의 여섯 해 정을 저버리겠다는 것이냐?"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온 도성의 웃음거리로 만들 셈이냐?"
말이 이어질수록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 갔다.
임지헌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여섯 해나 마음에 두었다는 것도, 구씨 가문이 체면을 중히 여긴다는 것도.
오늘 혼례가 어그러지면 수많은 이의 웃음거리가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참을 것이고, 감히 떠나지는 못하리라 여긴 것이다.
나는 임지헌을 바라보았다.
"세자 저하 말씀이 맞습니다."
"예전의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임지헌의 입가에 안도의 웃음이 스쳤다.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예전 일입니다."
그의 웃음이 굳었다.
"하온아, 적당히 해라."
그때 시녀가 비틀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대감님,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진시 삼각까지 차 반 잔 마실 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꽃가마는 이미 대문 앞에 대령했고, 복돈도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어서 가마에 오르지 못하면 혼례 시각을 놓치게 됩니다!"
모든 친척의 시선이 임지헌에게 쏠렸다.
큰외숙부가 낮게 말했다.
"임 세자, 하온과 혼례를 치를 생각이 있다면 지금 당장 손을 잡고 나서게."
외숙모도 거들었다.
"서민주 아씨는 이곳에 남아 화장을 고치면 됩니다."
"시집길을 배웅할 벗 하나 빠진다고 혼례 행렬을 못 꾸릴 것은 없지 않겠습니다."
서민주가 벌떡 일어섰다.
"무슨 말씀이세요?"
"하온이의 시집길을 배웅해야 하는데, 어찌 저만 남겨 두십니까?"
사촌 오라버니가 싸늘하게 웃었다.
"시집길을 배웅할 벗 하나 빠진다고 혼례를 치르지 못할 일은 없다."
"신부가 혼례 시각을 놓치는 것이야말로 진짜 좋지 않은 일이지."
서민주는 입술을 깨물며 임지헌을 바라보았다.
"지헌 오라버니..."
그 한마디에 임지헌은 본능처럼 서민주 앞을 막아섰다.
"그만하십시오!"
"민주를 굳이 탓할 까닭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임지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임지헌."
"마지막으로 묻겠다."
"지금 하온이를 데리고 나설 테냐?"
임지헌은 잠시 입을 다물고 서민주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민주가 다 그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뜻밖에도 평온했다.
나는 탁자 위의 붉은 비단 부채를 들어 얼굴 반을 가렸다.
그리고 임씨 가문에서 보내온 동심결(同心結)을 풀어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제5화
임지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온아,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나는 거의 바닥난 물시계를 바라보았다.
"말씀드렸습니다. 혼례 시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요."
"이제 저는 집을 나서야 합니다."
임지헌이 손을 뻗어 나를 막아섰다.
"허튼짓하지 마라!"
"내가 네 손을 잡지 않으면, 누가 너를 꽃가마에 태우겠느냐?"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세자 저하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둥근 부채를 들고 곧장 문밖으로 나섰다.
등 뒤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온이가 혼자 나선다고?"
"신랑은 아직 방 안에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서민주도 뒤따라 나왔다.
"하온아, 난 그저 화장을 조금 고쳤을 뿐인데 네가 이토록 일을 키울 줄은 몰랐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막 회랑에 이르렀을 때, 임지헌이 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구하온! 오늘은 두 가문의 혼례 날이다."
"국공부에는 손님이 가득하고, 폐하와 황후마마께서도 하사품을 내리셨다."
"그런데 홀로 대문을 나서서, 온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자는 것이냐?"
나는 임지헌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온 도성이 우리를 비웃게 만든 이가, 정말 접니까?"
임지헌은 숨을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눈시울을 붉힌 채 뒤따라 나왔다.
아버지는 그 곁에 선 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하온아."
"정말 생각을 굳힌 것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모가 지팡이를 짚고 회랑 아래로 나오셨다.
"생각을 굳혔으면 가거라."
"구씨 가문의 딸이라면 고생은 견딜지언정, 남에게 체면을 짓밟히게 둘 수는 없다."
"혼례 시각이 되었으니, 당당히 집을 나서거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
나는 다시 발을 내디뎠다.
대문 밖에는 붉은 비단이 길게 깔리고, 풍악이 울려 퍼졌다.
긴 거리는 국공부 세자가 구씨 가문의 적녀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임지헌이 뒤따라왔다.
"하온아, 일을 꼭 이 지경까지 몰고 가야겠느냐?"
나는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몇 걸음 앞에는 꽃가마가 놓여 있었다.
저 가마에 올라 붉은 너울을 쓰는 순간, 나는 국공부의 세자부인이 된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세자 저하, 혼례 시각이 다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지금 제 손을 잡고 가마에 태우시겠습니까?"
주변이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수백 쌍의 눈이 일제히 임지헌에게 쏠렸다.
그는 손가락을 꽉 쥐었다. 눈빛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으나, 이내 짜증에 묻혔다.
"하온아, 더는 고집부리지 말거라."
"민주가 꽃무늬를 다 그리면 함께 나서자."
"민주는 네 시집길을 배웅할 벗이다. 그 애 없이 어찌 예를 온전히 갖추겠느냐?"
마음이 마침내 완전히 식어 버렸다.
대문 밖의 혼례 행렬과 거리를 메운 사람들, 눈시울을 붉힌 내 부모님과 나를 모두 보았음에도,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서민주가 미간의 꽃무늬를 다 그렸는지뿐이었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세자 저하."
"역시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군요."
그의 낯빛이 변했다.
"무슨 뜻이냐?"
나는 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혼례 시각을 알리는 징이 울리더니 거리 끝에서 묵직한 말발굽 소리가 가지런히 울려 퍼졌다.
어전 금오위가 황금빛 의장 행렬을 호위한 채, 안개를 가르며 다가왔다.
곧, 검은 망포 혼례복을 입은 사내가 말 위에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온아, 때가 되었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