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章
가스레인지가 폭발했다.
송연서가 중상을 입고 죽어가던 순간, 그녀의 곁을 지킨 건 고작 5살 난 아들, 지민호뿐이었다.
송연서는 영혼이 된 채 지민호의 곁에 서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지성훈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돌아와 엄마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성훈은 오히려 아이를 다그쳤다.
[너 엄마한테 거짓말하는 법까지 배웠어?]
그리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민호는 눈물을 닦고 어렵게 119에 신고해서 구급차를 불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성훈이 그 구급차마저 빼앗아 갔다.
“아빠, 엄마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곧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엄마 구급차 뺏어가지 마...”
“이 거짓말쟁이야. 어린애가 네 엄마한테 못된 것만 배웠구나!”
지성훈은 눈이 붉게 충혈된 지민호를 거칠게 밀쳐냈다.
“비켜. 서희가 곧 애를 낳아. 서희가 연서보다 구급차가 더 급해!”
지성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윤서희를 안고 구급차에 올라탔다.
“아빠... 아빠! 엄마 좀 살려줘!”
지민호는 울면서 구급차를 따라 달려갔다.
하지만 그 순간,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대형 트럭을 미처 보지 못했다.
“민호야!”
송연서는 목이 터져라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이를 밀쳐내고 대신 트럭에 치이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없는 영혼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자신의 아들이 거대한 트럭의 바퀴 아래 깔리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닥은 온통 새빨간 피로 물들었다.
송연서는 미칠 것 같았다.
그동안 지성훈은 윤서희 모녀를 위해 수없이 송연서와 지민호를 내팽개쳤다.
송연서가 그때마다 따져 물으면, 지성훈은 늘 같은 말을 했다.
윤서희의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 때문이라고.
송연서는 그저 지성훈이 은혜와 가족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자신의 아내와 아들의 목숨마저 이렇게 저버릴 줄은 몰랐다.
‘내가 민호를 죽게 했어...’
송연서는 뼈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지성훈과는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제1화
송연서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아들을 달래 재웠다.
그리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야 송연서는 자신이 정말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을 관통하던 그 지독한 고통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손발에 힘이 풀릴 정도였다.
송연서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윤서희의 SNS에는 여전히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사진에는 윤서희가 살짝 불러온 배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한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 아래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28번째 생일에 그 사람이 나한테 프러포즈했어요. 나와 우리 아기에게 가족이 되어 주겠대요.]
송연서는 단번에 남자의 오른손 약지에 있는 작고 검은 점을 발견했다.
지성훈이었다.
이런 장면을 이미 한 번 겪었는데도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렸다.
지성훈은 윤서희에게 프러포즈하기 전에 자신의 아내와 아들인 지민호를 생각해 본 적은 있었을까?
하지만 지성훈은 전생에서 두 사람의 목숨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대체 뭘 기대할 수 있을까?
‘모두 내가 어리석었던 탓이야.’
지성훈이 은혜를 갚기 위해 윤서희에게 잘해주는 것뿐이라는 말을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송연서와 지민호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송연서는 전생에 자신과 아들이 죽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울었다.
송연서는 지성훈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결혼을 당장 끝내고 싶었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새벽 3시가 되었다.
지성훈은 송연서의 벌겋게 충혈된 눈을 보더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흰 셔츠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닦아냈다.
“립스틱은 서희가 실수로 묻힌 거야. 결혼반지도 잠깐 뺀 것뿐이고. 괜한 생각 하지 마.”
그동안 지성훈은 윤서희와 껴안고 다니기도 했고, 호텔에서 함께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성훈이 했던 말은 늘 똑같았다.
“괜한 생각 하지 마.”
송연서는 이제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송연서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늘 나한테 괜한 생각 하지 말라고 하잖아. 그럼 내가 훈이네 집에 있다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돌아와도 당신은...”
지성훈은 송연서가 또 윤서희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정말 적당히 좀 해. 정훈은 너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사람이잖아. 나는 윤서희한테 은혜를 갚는 것뿐이고. 이게 어떻게 같아?”
어떻게 다르지?
송연서는 반박하려다가 그 말을 삼켰다.
그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나 결심했어. 우리 이혼해.”
제2화
사흘 전, 지성훈이 윤서희와 함께 산부인과 검진을 받는 영상이 인터넷에 크게 퍼졌다.
누군가 지성훈이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폭로했고, 인기 여배우 윤서희가 불륜녀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누리꾼들은 윤서희를 욕하기 시작했다.
윤서희는 정신적으로 무너져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지성훈은 상처 입은 윤서희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송연서를 찾아가 위장 이혼을 하자고 했다.
그런 다음 윤서희와 혼인신고를 해서 악플러들의 입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송연서는 그게 너무나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해서 계속 거절했다.
하지만 이제 송연서가 지성훈을 원하지 않았다.
원래 지성훈은 송연서가 속이 좁다고 여기며 짜증스러워했다.
그런데 송연서가 이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마자, 지성훈의 화는 곧바로 풀렸고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잘 생각했어. 내가 바로 이혼 합의서 만들어올게!”
“지성훈,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이혼은 하되 조건을 바꿔야 해. 나는 빈손으로 나갈 수 없어. 부부 재산은 공평하게 반씩 나눠!”
“위장 이혼일 뿐인데, 왜 그렇게 진지하게 나와?”
지성훈이 기억하는 연애 시절의 송연서는 늘 다정하고 대범했다.
지성훈은 송연서가 도대체 언제 이렇게 인색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송연서는 지성훈의 눈빛에 상처를 입고 힘겹게 말했다.
“싫으면... 다 그만두던가.”
그 말을 듣자 지성훈은 조급해졌다.
“아니야! 다 네 말대로 할게. 그러면 됐지?”
지성훈은 송연서가 마음을 바꿀까 봐 새벽 1시 반에 변호사를 불러 이혼 합의서를 수정하게 했다.
지성훈도 위장 이혼이 송연서에게 아주 미안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서희의 아버지는 지성훈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지성훈은 윤서희를 구설수에 빠뜨릴 수 없어 아내인 송연서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새 이혼 합의서가 인쇄되자마자 지성훈은 펜과 함께 이혼 합의서를 송연서의 손에 쥐여 주었다.
“빨리 서명해!”
송연서는 지난날의 사랑을 떠올리며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다른 여자를 위해 나한테 이런 짓까지 하면서... 내가 상처받고 영원히 당신을 떠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지성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너랑 진짜로 이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윤서희와 혼인신고하고 결혼식만 올리는 거야. 이 소동이 잠잠해지면 다시 결혼하면 돼. 우리 감정에는 영향 없어!”
감정?
송연서는 그 두 글자를 듣고 그저 웃음만 나왔다.
지성훈에 대한 모든 감정은 이미 전생에 아들 지민호가 죽었을 때 산산이 부서졌다.
지성훈이 계속 재촉하는 가운데 송연서는 이혼 합의서에 서명을 마쳤다.
지성훈은 이혼 합의서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한번 서명했으니 후회하면 안 돼. 숙려기간이 끝나면 이혼 신고하러 가자!”
“그래.”
송연서는 그런 지성훈을 바라보며, 온 마음을 다해 지성훈을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지성훈은 송연서의 이상한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이혼 합의서 사진을 찍어 윤서희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느라 정신이 팔렸었다.
송연서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지성훈을 불러 세웠다.
“오늘 민호가 고열이 났다는 거 알아?”
“응, 약은 먹였어. 그리고 민호가 또 떼를 부릴까 봐 일부러 잠든 뒤에 나간 거야!”
“그리고 솔직히 너도 윤서희한테 아이 교육을 배워야 해. 서진이가 민호보다 훨씬 말을 잘 듣는다니까.”
고열이 나는 5살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나왔으면서도 지성훈은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 순간 송서연의 목구멍에는 쌓아 둔 따짐이 가득했지만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실망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미화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게 되면...
송연서는 다시 지성훈을 바라보며 비열하고 한심하기 그지없다고 느꼈다.
다음 날 아침, 구청 문이 열리기도 전에 송연서는 지성훈에게 끌려가 줄을 섰다.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던 해, 지성훈은 윤서희가 만든 갖가지 ‘돌발 상황’ 때문에 10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이제 이혼 신청을 제출할 때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송연서는 자기 마음이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코끝이 자꾸 시큰해졌고, 서명할 때 손도 조금 떨렸다.
이혼 신청을 마치자 지성훈은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너는 알아서 택시 타고 돌아가. 나는 서희와 한 달 뒤 결혼식 얘기를 좀 해야 해!”
지성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몇 걸음 뒤처진 송연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송연서는 빠르게 멀어지는 지성훈의 차를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송연서가 지성훈과 막 연애를 시작했던 그 2년 동안, 지성훈은 송연서에게 지극정성이었고 송연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후에 윤서희가 나타났다.
지성훈은 어쩔 수 없이 송연서를 윤서희 뒤로 밀어냈다.
송연서는 한때 이혼을 요구하며 소동을 벌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성훈은 말했다.
“내가 서희에게 잘하는 건 은혜를 갚기 위해서일 뿐이야. 서희 아버지가 나를 구하려다 돌아가셨으니까! 하지만 너는 달라. 너에게 잘하는 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송연서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매번 지성훈에게 마음이 상하고 떠나기로 결심해도, 지성훈이 붙잡을 때마다 송연서는 다시 미련이 남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여러 해 얽혀 있다가, 결국 송연서와 아들 지민호는 비참하게 죽었다.
다시 살 기회를 얻었으니, 송연서는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다!
송연서는 결혼반지를 빼서 중고 명품점에 팔았다.
그 반지는 지성훈이 직접 디자인하고 다듬은 것으로, 송연서에 대한 모든 사랑을 담았다고 지성훈이 말했다.
하지만 이제 송연서는 지성훈이 무릎 꿇고 프러포즈하던 다정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저 지독한 거짓말이라고 느낄 뿐이었다!
송연서는 반지를 팔고 집에 돌아와 자신과 지민호의 물건을 챙겼다.
우선 호텔에 가 있을 작정이었다.
이혼하면 지민호를 데리고 자신에게 상처만 남긴 이 도시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송연서가 몇 가지도 정리하지 못했을 때, 지민호가 울면서 달려왔다.
“엄마, 선생님이 전화했는데, 아빠가 강 선생님의 제자 자리를 윤서진에게 줬대. 어떡해?”
제3화
쨍그랑!
송연서의 손에 들려 있던 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지민호는 이제 5살이지만 피아노를 좋아했고, 특히 강천휘의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
강천휘는 성격이 괴팍해 제자를 받지 않았다.
송연서는 아들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강천휘의 아내인 정희연에게 접근했다.
직접 만든 간식을 보내고, 선물도 챙겼다.
함께 쇼핑하러 다니고, 피부 관리와 미용실에도 동행했다.
꼬박 2년을 애쓴 끝에 강천휘가 마침내 제자 자리 하나를 지민호에게 내주었다.
전생에 송연서가 좀처럼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자 윤서희는 오랫동안 불륜녀라는 꼬리표를 달고 욕을 먹었다.
그 후 지성훈은 지민호의 제자 자리를 빼앗아 윤서희에게 보상해 주려 했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송연서가 선뜻 이혼을 받아들였는데도 왜 지성훈은 여전히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송연서는 가슴 위에 천근같이 무거운 돌덩이가 눌린 듯했다.
송연서는 몸을 숙여 지민호의 눈물을 닦아준 뒤, 휴대폰으로 지성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섯 번이나 연달아 전화를 걸었지만 지성훈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윤서희의 SNS가 또 업데이트되었다.
[착한 딸 서진이가 강천휘 선생님의 유일한 제자가 되었어요. 네 재능과 노력이 마침내 사람들에게 인정받았구나. 엄마는 정말 기뻐!]
윤서진과 강천휘가 함께 찍은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댓글은 칭찬 일색이었다.
[서진이는 정말 대단해. 엄마를 닮아서 미모도 실력도 최고야!]
[강 선생님은 제자를 절대 안 받는데, 이 꼬마는 엄청난 천재인가 봐?]
[너무 부러워. 역시 윤서희가 이렇게 훌륭한 딸을 낳았구나!]
사진 속 윤서진이 환하게 웃는 만큼, 지민호는 지금 그만큼 슬프게 울고 있었다.
송연서는 가슴이 꽉 막힌 채 지민호의 손을 잡고 곧장 달려갔다.
그런데 강천휘의 집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지성훈에게 가로막혔다.
지성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송연서와 지민호를 보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희가 와서 난리 칠 줄 알았다고!”
지민호는 억울한 마음에 울먹였다.
“민호는 난리 치러 온 게 아니야... 이 자리는 원래 내 거였어.”
지성훈은 몸을 숙여 지민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진이도 강 선생님을 아주 좋아해. 네가 이 자리를 서진이한테 양보하면 안 될까?”
“싫어. 나도 강 선생님을 좋아해!”
지민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지성훈의 표정이 돌변했다.
지성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민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만해. 넌 오빠고 서진이는 동생이잖아. 오빠가 동생한테 양보해야지.”
“자리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다투다니, 네 엄마가 널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렇게 속 좁게 행동해?”
지민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빠가 자기 것을 빼앗고도 자신을 나무라는지 알 수 없었다.
지민호는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보자 송연서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전생에 송연서가 정면으로 맞섰을 때도 결국 이 자리를 되찾지 못했다.
이번에는 속에서 온갖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송연서는 화를 눌렀다.
“나 이 자리 하나 얻어주려고 2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부탁할게. 이 자리, 민호한테 돌려주면 안 될까?”
이것은 그동안 송연서가 처음으로 지성훈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지성훈은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서진이한테 약속했어. 걱정 마. 민호한테 아무것도 안 주는 건 아니야. 민호가 제일 좋아하는 레고도 준비했어.”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송연서는 깨달았다.
송연서가 어떻게 해서든 지성훈은 송연서와 지민호의 것을 빼앗아 윤서희 모녀에게 줄 구실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정말 실망하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송연서는 지성훈을 피해 강천휘의 집으로 뛰어들려 했다.
어차피 정희연과 친분이 있는 사람은 송연서였다.
잘 설명하면 자리는 다시 지민호의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송연서는 두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지성훈에게 억지로 안겨 차에 밀어 넣어졌다.
“놔! 당신은 나와 민호에게 이럴 수 없어!”
송연서가 무너진 듯 울부짖었다.
“나를 때리고 욕해도 좋아. 원하는 보상이 있으면 다 해줄게. 하지만 오늘은 서진이한테 중요한 날이야. 네가 망치게 둘 순 없어.”
지성훈도 송연서와 지민호에게 미안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자리는 윤서진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지성훈은 당시 윤서희의 고백을 거절하고 송연서를 선택했으니, 다른 방법으로라도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윤서희에게 어떤 서러움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송연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지성훈이 손을 놓았을 때, 입문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
송연서는 차에서 뛰어나와 정희연을 찾아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정희연은 미안한 듯 말했다.
“미안해. 입문식이 이미 끝났고, 이제 모두가 윤서진이 우리 남편의 제자라는 걸 알아. 지금 와서 사람을 바꾸면 누구도 체면이 서지 않아.”
송연서가 아무리 억울해도 소용없었다.
정희연조차 강천휘를 설득해 제자를 하나 더 받게 할 수는 없었다.
정희연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윤서희는 윤서진의 손을 잡고 넋이 나간 송연서 앞으로 걸어왔다.
“덕분에 우리 서진이가 이렇게 좋은 선생님께 배울 수 있게 됐어. 전에 언니가 홍보 계정을 매수해서 내가 불륜녀라는 소문을 퍼뜨린 일은, 이번에는 묻지 않을게!”
지성훈은 윤서희 곁에 서서 다정하게 말했다.
“묻지 않아 줘서 고마워. 연서도 너처럼 좀 대범했으면 좋겠어.”
송연서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가슴이 아플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송연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홍보 계정들을 산 건 내가 아니야!”
제4화
“서희가 이렇게 증거까지 다 내놨는데도 아직 인정하지 못하겠어? 정말 너한테 너무 실망했어. 민호가 저렇게 된 것도 다 네가 잘못 가르친 탓이야. 거짓말을 밥 먹듯 하잖아.”
지성훈은 실망한 눈으로 송연서를 바라보며 윤서희 모녀를 데리고 떠났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대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성훈 오빠, 난 괜찮아. 그러니까 언니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나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우는 건 싫어.”
“네가 착한 건 좋은데, 너무 착해서도 안 돼. 그러다간 다른 사람한테 이용당하기 십상이야.”
송연서는 윤서희 모녀에게 누명을 뒤집어쓴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성훈은 윤서희를 편애했고, 그래서 잘못한 쪽은 언제나 송연서였다.
송연서가 이혼하려고 할 때마다 지성훈은 실망한 얼굴로 송연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으니까, 그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잖아. 민호도 너처럼 살게 하고 싶어? 정말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할래?”
그래서 송연서는 참았다.
하지만 지난 생에서 지민호가 죽던 순간, 송연서는 후회했다.
진작 아이를 데리고 떠나야 했다!
다행히 한 달만 더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
그 후로는 지성훈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될 것이다!
송연서는 넋이 빠진 얼굴로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지민호가 말했다.
“엄마, 나 이제 피아노 안 배워도 돼. 강 선생님도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 마.”
지민호는 자기 눈이 아직 부어 있는데도 오히려 송연서를 위로했다.
송연서는 슬프고 미안한 마음에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지민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엄마 안 울었어.”
“그런데 엄마 눈은 많이 슬프다고 말하는데.”
그 말에 송연서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미안해. 다 엄마가 무능해서 그렇다.”
다 송연서가 무능하고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거였다.
아들까지 송연서와 함께 고생하게 만든 셈이었다.
지민호가 작은 손으로 송연서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는 민호가 제일 사랑하는 엄마니까.”
송연서는 지민호를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한참 후 모자는 눈물을 닦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지성훈과 윤서희 모녀는 이미 집에 도착해서 짐을 옮기고 있었다.
“성훈 오빠가 사람들 앞에서 나한테 청혼했잖아. 당연히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어? 이해해 줄 수 있지?”
윤서희는 송연서를 보자마자 서둘러 다가와 도발했다.
송연서는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는 지성훈의 경고 섞인 눈빛을 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살든 마음대로 해. 나와는 상관없으니까.”
어차피 송연서는 이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윤서희는 송연서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말투... 나한테 화내는 거야?”
그러자 지성훈이 황급히 걸어와 윤서희를 뒤로 보호했다.
“네가 여기저기에 서희가 내연녀라는 소문을 퍼뜨렸잖아.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서희와 위장 결혼을 하는 거야. 원인 제공은 네가 한 거니까 남 탓하지 마!”
송연서는 이제 반박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래.”
지성훈은 오늘 송연서가 순순히 따르는 게 만족스러웠다.
“네 잘못인 걸 알았으면 됐어. 서희는 임산부니까 안방을 쓰게 해줘. 채광이 좋으니까.”
“서진이가 민호 방을 마음에 들어 하니까, 당분간 너희 모자는 객실에서 지내.”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윤서희 모녀가 탐내는 것은 무엇이든 송연서 모자가 양보해야 했다.
송연서는 예전에는 지성훈의 결정에 억울해서 꼭 시비를 걸고 따졌다.
지금은 그저 마음이 지독하게 지쳐 있었다.
“알았어.”
송연서는 원래라면 자기 물건이라도 제대로 챙기려 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늦은 데다 지민호에게 아직 미열이 있는 것만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지민호를 데리고 나갔을 것이다!
지성훈이 뭐라 더 말하려 했다.
송연서는 두 사람의 억지소리를 듣기 싫어서 지민호를 안고 객실로 갔다.
지민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 객실은 손님이 자는 데잖아? 우리 집인데 왜 우리가 여기서 자?”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손님이니까.”
송연서는 지민호에게 해열 패치를 붙여주고 일찍 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성훈이 문을 두드리며 송연서를 찾았다.
“무슨 일이야?”
송연서는 언젠가 지성훈의 얼굴만 봐도 지긋지긋해질 줄은 몰랐다.
지성훈은 송연서의 태도가 아주 불만스러웠다.
“네가 내 아내인데, 별일 없으면 찾아오면 안 되는 거야?”
평소라면 지성훈이 이렇게 말할 때 송연서는 꼭 한두 마디 받아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성훈이 말을 마친 뒤에도 송연서는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쳐 있었다.
한 글자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지성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송연서가 속상할까 봐 지성훈은 송연서에게 설명했다.
“이번에 내가 민호 자리를 서진이한테 준 건 확실히 잘못했어. 하지만 서희 아버지가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야. 서희가 서진이를 위해 그 자리를 달라고 하는데 내가 거절할 수는 없잖아.”
송연서는 씁쓸하게 물었다.
“당신이 은혜를 갚고 싶은 건데 꼭 나와 민호를 희생시켜야 해?”
제5화
“고작 그런 자리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따져? 나중에 지씨 가문 재산은 전부 아들 거야. 아들에게 못 줄 게 뭐가 있겠어?”
“너희 모자는 정말 똑같이 속이 좁아!”
지성훈은 자신이 지민호의 자리를 빼앗은 게 잘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원래는 레고와 목걸이를 들고 송연서와 지민호에게 사과하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송연서가 뭐든 윤서희 모녀와 겨루려 드니, 지성훈은 이 상황이 지겨워졌다.
자신과 지씨 가문 전부를 송연서에게 줬는데, 가끔은 윤서희 모녀에게 양보하는 게 안 되는 건가?
지성훈은 더 이상 송연서와 다투기 싫어서 냉랭한 얼굴로 떠났다.
송연서는 지성훈이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도 지난날처럼 붙잡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송연서는 피곤해서 미간을 짚고 문을 닫은 뒤 침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울부짖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민호야!”
송연서는 번개같이 정신이 들어 맨발로 뛰어나갔다.
장난감 방에서 지성훈이 윤서진을 안고 윤서희와 함께 애지중지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지민호는 세 사람 앞에 서서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채 울고 있었고, 뺨에는 새빨간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지성훈은 마치 그 손자국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송연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지민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엄마한테 말해봐. 무슨 일이야?”
지민호가 대답하기 전에 윤서희가 분개하며 말했다.
“내가 때렸어! 언니는 평소에도 속이 좁아서 나랑 성훈 오빠 사이를 질투하잖아. 온갖 방법으로 나를 괴롭혀도 나는 참고 넘어갔어.”
“그런데 아들이 겨우 5살인데, 어떻게 남을 괴롭히라고 아이한테 가르칠 수 있어?”
송연서는 얼굴을 굳혔다.
“민호가 이유 없이 남을 괴롭힐 애가 아니야! 때렸으면 사과해!”
말이 끝나자마자 지성훈이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
“송연서, 그만해! 민호가 서진이 장난감을 뺏고 밀쳐서 서희가 손을 댄 거야.”
“다 네가 아이를 너무 응석받이로 키워서 버릇이 없는 거야. 서희가 대신 교육해 준 거라고!”
지민호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빠, 민호는 장난감 안 뺏었어. 서진이가 내 인형을 뺏은 거야.”
지성훈은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지민호를 나무랐다.
“너는 오빠잖아. 동생한테 양보 좀 해주면 안 돼?”
지민호가 흐느꼈다.
“그런데 서진이가 가위로 내 인형을 잘라버렸어. 그 인형은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신 거야!”
송연서는 너무 급하게 와서 미처 보지 못했는데, 지민호의 말을 듣고 보니 바닥에 인형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주 잘게 잘려서 다시 꿰매기도 어려웠다.
전말이 다 밝혀졌으니, 이번에는 지성훈이 자신이 지민호를 오해한 걸 깨닫고 사과할 줄 알았다.
하지만 윤서희가 지성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투덜거렸다.
“서진이가 겨우 5살인데 뭘 알겠어? 인형을 잘게 자르면서 놀았겠지.”
지성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민호에게 말했다.
“됐어. 너도 남자애인데 그렇게 속 좁게 굴지 마.”
그 말에 송연서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날 뻔했다.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이 인형은 내 친정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민호 주려고 손수 만드신 거야!”
윤서진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줌마 무서워! 무서워!”
지성훈은 윤서진의 눈물을 닦아주며 송연서를 꾸짖었다.
“서진이가 너 때문에 울잖아. 애가 뭘 안다고 그렇게까지 일을 크게 키워? 이 일은 여기서 끝내. 또 시비 걸면 너희는 앞으로 여기 살지 마!”
지성훈은 윤서진을 안고 윤서희와 함께 나가버렸다.
송연서와 지민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송연서는 가슴이 꽉 막힌 듯 숨이 턱 막혔다.
예전 같으면 틀림없이 지성훈을 찾아가 시시비비를 가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성훈에게 진작 완전히 실망해버린 지 오래였다.
송연서는 지민호를 달랜 뒤 바닥에 흩어진 인형 조각을 주워 모아 복구를 시도했다.
하지만 손에 상처만 여러 개 났을 뿐, 인형은 여전히 조각나 있었다.
송연서는 손의 상처를 보다가 문득,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눈물을 흘리며 자기 손을 잡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는 죽는 게 무섭지 않아. 다만 엄마가 죽으면, 너와 민호를 지켜줄 사람이 없을까 봐 그게 겁난다.”
“우리 사위는 정이 많은 사람이지만, 사람 보는 눈이 없어.”
“그리고 그 윤서희라는 애도 보통은 넘는 애다.”
“사위가 윤서희 모녀 편을 들기만 하니, 앞으로 너와 민호는 어떡할래?”
그때 송연서는 자신 있게 약속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성훈이가 윤서희한테 잘하는 건 은혜를 갚으려는 것뿐이에요. 지 서방은 저를 사랑하니까 저와 민호를 해치지 않을 거예요!”
송연서는 그때 지성훈을 온전히 믿고 사랑했던 어리석은 자신이 그저 한없이 가여웠다.
송연서는 인형 조각을 챙겨 지민호를 데리고 가장 가까운 호텔로 나갔다.
더 이상 이 ‘집’에 남아 마음대로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송연서가 호텔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지성훈이 찾아왔다.
“방금 서희가 너랑 민호를 봤다고 해서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정말 너희였구나. 집에 안 있고 호텔에 왜 온 거야?”
지민호는 지성훈을 보자 반갑게 아빠라고 부르지도 않고, 겁먹은 듯 송연서 뒤로 숨었다.
그 겁먹은 모습을 본 송연서는 가슴이 아팠다.
“나랑 민호가 나갈게. 당신들이 굳이 쫓아낼 필요 없어.”
제6화
그 말을 들은 지성훈은 잠시 멍해졌다.
“나가라고 한 건 그냥 홧김에 한 말이야. 거긴 영원히 너랑 민호의 집이야.”
실은 그곳이 지성훈의 집이었다.
자신과 지민호의 집이 아니었다.
송연서는 더 이상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그게... 오늘 아침 인형 일은 내가 잘못했어. 너랑 민호에게 사과하러 왔어.”
“하지만 서희 모녀가 처지가 딱하잖아. 게다가 내 생명의 은인의 딸인데, 내가 어떻게 모질게 대하겠어.”
비슷한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지성훈이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이유로, 왜 자신과 지민호가 계속 상처를 감수해야 하는 걸까?
애초에 자신과 지민호는 윤서희 모녀에게 빚진 것도 없었다.
송연서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지성훈은 몸을 숙이더니 등 뒤에서 인형 하나를 꺼내 지민호를 달랬다.
“울지 마. 아빠가 새 인형 사 왔어. 이거 마음에 들어?”
지민호는 아직도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싫어. 난 할머니가 만들어 준 것이 좋아!”
지성훈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다 똑같은 인형인데 그게 뭐가 달라?”
그 모습을 본 송연서는 애써 참으며 말했다.
“아들에게 사과하러 왔다면서.”
지성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아들을 혼내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남자애를 이렇게 유난스럽게 키우면 되겠어? 너도 서희한테 애 키우는 법을 좀 배워야 한다는 거야. 서진이는...”
“민호는 아직 열이 나. 약 먹었으니까 쉬어야 해. 더 볼일 없으면 이제 돌아가.”
송연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지성훈의 말을 가로막고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런데 지성훈이 문을 붙잡았다.
지성훈은 다소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서희가 네 웨딩 플래닝을 마음에 들어 하더라. 첫 결혼이라 굉장히 신경 쓰는 모양이야. 네가 우리 결혼식 웨딩 플래닝을 맡아줬으면 좋겠대.”
그 순간 송연서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뻔뻔한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송연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 너무한 거 아니야?”
지성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금액은 세 배... 아니, 열 배로 줄게. 그러면 해줄 수 있겠어? 서희에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냥 네가 만든 웨딩 플랜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
“미안하지만, 못 해!”
송연서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이를 악물고 힘껏 문을 닫았다.
지성훈이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송연서는 끝내 열지 않았다.
그저 문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성훈은 이게 얼마나 지나친 요구인지 알면서도 또다시 송연서를 몰아붙였다.
그저 송연서가 아직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송연서는 이제 지성훈을 원하지 않았다.
송연서는 이 일이 여기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성훈이 자신이 다니는 웨딩 회사를 팔아버리겠다고 협박할 줄은 몰랐다.
비서가 송연서에게 전화를 걸어 통보했다.
[지 대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윤서희 씨의 웨딩 플랜을 맡든지, 아니면 이 웨딩 회사를 팔든지 하라고요!]
송연서는 예전에 지성훈에게 이 웨딩 회사가 친정아버지가 운영하던 곳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돌봐야 했고, 회사 경영도 할 수 없어서 결국 회사를 팔 수밖에 없었다.
지성훈이 송연서를 쫓아다니던 시절,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고 이 웨딩 회사를 사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윤서희의 웨딩 플랜을 맡기기 위해 그 회사를 다시 팔려고 했다!
송연서는 지성훈에게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오늘 서희랑 웨딩 사진 찍어야 해.]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내가 이 웨딩 회사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서!]
지성훈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도 송연서는 받아들였다.
지성훈이 신혼집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도 송연서는 선선히 양보했다.
그런데 왜 계속 자신을 몰아붙이는 걸까?
곧 지성훈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묻어났다.
[누구도 너를 압박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웨딩 플랜 하나 만들어주면 되는 거잖아. 그게 네 일이기도 하고. 윤서희를 평범한 고객으로 생각하면 안 돼?]
송연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 해.”
[왜 못 해? 네가 나랑 서희가 만나는 걸 신경 쓰는 거 알아. 하지만 서희는 내 생명의 은인의 딸이야. 내가 어떻게 남처럼 지낼 수 있겠어?]
그때 윤서희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지성훈을 불렀다.
[오빠, 빨리 와. 사진 찍어야지.]
지성훈은 급하게 송연서에게 경고했다.
[서희 결혼식 플래닝 안 해주면, 이 웨딩 회사 팔아버릴 거야.]
그리고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끊기기 전, 그쪽에서 사진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랑은 신부 허리를 감싸고, 조금 더 진하게 키스해 주세요.]
[네, 바로 그렇게!]
송연서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다.
지성훈에게 이미 충분히 실망했다.
그런데 지성훈은 언제나 송연서를 더 깊이 절망하게 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밤, 윤서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먼저 사진 몇 장이 함께 도착했다.
[너랑 민호의 물건이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해서 내가 다 내버렸어. 성훈 오빠도 괜찮다고 했어!]
[아, 맞다. 민호가 받기로 했던 그 자리도 내가 일부러 뺏은 거야. 우리 서진이는 원래 피아노 치는 것도 좋아하지 않거든.]
[그 인형도 내가 서진이한테 자르라고 했어. 죽은 사람이 만든 물건이라니, 너무 불길하고 재수 없잖아!]
[화났어? 그러다 민호까지 화병 나서 죽으면 어떡해? 그러면 나 재미없잖아!]
[성훈 오빠가 오늘 나랑 같이 잤어. 설마 오빠가 나한테 잘해주는 게 정말 은혜 갚으려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나 이미 아기까지 가졌는데도 네가 매일 그렇게 사납게 굴어서 정말 못 견디겠어.]
그리고 또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 속 지성훈은 상반신을 벗은 채 침대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지성훈은 허리춤의 벨트를 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이 다음에 무엇을 하려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제7화
송연서는 메시지를 하나 읽을 때마다 가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
윤서희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면 늘 그랬듯 하나씩 전부 삭제했다.
송연서에게 캡처할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송연서는 바로 화면을 촬영해 두었다.
영상을 저장한 뒤, 애써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지민호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송연서는 결국 이 웨딩 플랜을 맡기를 거절했다.
지성훈도 그 웨딩 회사를 팔아버렸다.
[너를 겨냥한 건 아니야. 그런데 서희가 너 때문에 울었어. 나도 서희에게 뭔가 해줘야 하잖아.]
[화내지 마. 서희가 화 풀리면, 그 회사 다시 사 올게.]
송연서는 지성훈의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지성훈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성훈은 매번 그렇게 했고, 그때마다 송연서에게 참고 견디라고 요구했다.
예전에는 지성훈이 자신과 생명의 은인의 딸 사이에서 난처하지 않도록 하려고 애썼다.
윤서희가 안쓰러웠으니까.
하지만 지성훈은 송연서에게는 조금도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날 밤, 송연서는 지씨 가문의 사생아인 지승준과 식사를 약속했다.
“내가 가진 지선그룹 주식, 너한테 싸게 넘길 수 있어. 조건은 하나야. 25일 후에 거래하는 거야.”
지승준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 형은 나를 제일 싫어하는데. 형수가 이러면 형이 형수를 미워할까 봐 걱정되지 않아?”
“그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네가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팔 거야.”
“아이고, 내가 꼭 살게!”
지승준은 송연서와 합의를 마치고 휘파람을 불며 떠났다.
돌아가는 길에 지성훈을 만났다.
두 사람은 피가 섞였지만,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증오하는 사이였다.
평소에 만나면 서로 목을 조르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승준이 차분하게 지성훈을 불러 세웠다.
“형, 좀 궁금한 게 있는데. 형 주식의 절반이 형수 손에 있잖아. 형이 애인 때문에 형수한테 잘못했는데, 형수가 화나서 그 주식 나한테 다 팔면 어쩌려고 이래?”
지성훈이 비웃으며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헛된 꿈은 그만 꿔. 내 아내는 절대 나한테 손해가 되는 행동은 절대 안 해!”
지성훈은 송연서가 최근 많이 상처받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달래주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송연서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지성훈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주식을 지승준에게 파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송연서는 지승준이 지성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요 며칠 지민호는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열은 이미 내렸기에, 송연서는 아예 지민호를 데리고 밖에 나가 캠핑하며 별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송연서가 텐트를 거의 다 칠 무렵, 갑자기 지민호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송연서가 즉시 달려가 보니, 윤서희와 윤서진이 지민호의 망원경, 소시지, 그리고 신발과 옷을 빼앗고 있었다.
윤서희는 입으로 욕하며, 땅에 쓰러진 지민호를 발로 차려고까지 했다.
“윤서희, 내 아들 괴롭히지 마!”
송연서는 지민호 앞을 막아서며 윤서희를 노려보았다.
“왜 내 아들 물건을 빼앗고, 사람까지 때려?”
“이 잡종 새끼 물건을 내가 눈여겨봐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 내가 직접 안 빼앗아도, 내 한마디면 지성훈이 알아서 빼앗아 줄 거야. 그렇지 않아?”
윤서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송연서는 어지러울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너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내가 심하게 굴면 어쩔 건데? 너 같은 쓸모없는 년이 뭘 할 수 있는데?”
윤서희가 곧바로 송연서를 밀자 송연서는 언덕 아래로 굴렸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언니가 내가 오빠랑 결혼하는 게 질투 나서 나를 밀어버리려 했어. 내가 피했더니, 언니가 굴러떨어졌어. 어떡해?”
송연서는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 돌에 머리를 부딪혔고, 혹이 크게 부풀었다.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성훈이 송연서를 구해 올린 뒤 입을 열자마자 비난부터 했다.
“너 왜 이렇게 악독해?”
“지난번에 서희가 내연녀라는 소문을 사방에 퍼뜨렸을 때, 서희가 너한테 위자료 요구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데, 이번엔 아예 언덕 아래로 밀어버리려고? 너 미쳤어?”
지민호가 지성훈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줌마가 내 물건 빼앗고, 엄마를 언덕 아래로 밀었어. 엄마는 나쁜 짓 안 했어!”
지민호가 말을 마치자, 윤서희가 윤서진을 밀쳤다.
윤서진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저씨, 나랑 엄마 좀 살려줘. 아줌마랑 오빠가 우리한테 죽으라고 했어!”
윤서진은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
지성훈은 지민호의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 장면을 보고는 완전히 분노했다.
지성훈은 지민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좋은 건 안 배우고 나쁜 것만 골라서 배웠구나. 어린 나이에 네 엄마한테 거짓말만 배워서! 앞으로 내가 직접 가르칠 거야!”
“거짓말 안 했어...”
지민호가 크게 울었다.
지성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민호의 옷깃을 잡아 차 안으로 끌고 갔다.
“엄마! 엄마 살려줘! 아빠랑 가기 싫어!”
송연서는 어지럽고 분노로 가득했지만, 간신히 땅에서 일어났다.
“민호야,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갈게. 지성훈, 내 아들 돌려줘!”
하지만 송연서가 다가가기도 전에 차가 출발해 버렸다.
제8화
송연서는 집으로 달려갔지만, 대문의 비밀번호가 바뀌어서 문을 열 수 없었다.
송연서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건 가정 내 분쟁이라 경찰은 양측의 입장을 듣고 중재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경찰이 떠난 뒤, 지성훈이 차갑게 송연서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이를 너한테 맡긴 게 잘못이야! 당분간 서희가 아이를 맡아 가르칠 테니까, 웨딩 플랜을 다 완성하면 아이를 데려가!”
“싫어. 아이 돌려줘. 당신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송연서는 거의 무너져 내렸다.
지성훈은 송연서의 빨갛게 충혈된 눈과 이마와 몸 곳곳에 난 상처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윤서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는 아직 어리니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지성훈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송연서를 밖으로 밀어냈다.
쾅!
현관문이 닫혔다.
송연서는 문밖에 홀로 남겨졌다.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송연서에게는 아무것도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거의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윤서희는 매일 송연서에게 지민호의 영상을 보내왔다.
영상 속에서 윤서진은 지민호를 마치 말처럼 올라타서 괴롭히고 있었다.
또 다른 영상에서는 지성훈이 지민호를 몰아세우며 꾸짖고 있었다.
지민호는 또다시 벌을 서고 있었다.
송연서는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극심한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매일 지성훈과 윤서희의 다정한 모습이 화제가 됐다.
[지성훈, 윤서희 세 식구의 달콤한 나들이!]
[지성훈, 윤서희 위해 세기의 초호화 결혼식 준비... 현재까지 1000억 원 지출!]
[지성훈, 윤서희 위해 해외 작은 섬 낙찰받아 신혼여행!]
[지성훈이 말했다. 앞서 알려진 송 씨 여자는 집안 가사도우미... 그 아이는 가사도우미의 아들!]
윤서희는 웨딩 플랜에도 온갖 트집을 잡아댔다.
송연서는 윤서희의 요구대로 몇 번이나 수정한 끝에, 마침내 웨딩 플랜을 완성했다.
이제 아이를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민호를 데리러 가던 날, 극성팬 한 명이 칼을 들고 지민호의 가슴을 찔렀다.
현장 영상은 순식간에 인터넷으로 퍼져 나갔다.
영상 속 지성훈은 분명 지민호 바로 곁에 있었다.
그런데도 사건이 발생한 순간, 지성훈은 가장 먼저 윤서희 모녀를 감싸고 보호했다.
[지성훈이 위기의 순간 윤서희 구했다. 진짜 달콤해.]
해당 문구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무렵, 송연서는 응급실 앞에서 지민호의 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민호의 생사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성훈은 바로 옆에서 송연서를 몰아붙이며 계속해서 그녀를 탓하고 있었다.
“네가 극성팬들을 부추겨서 서희를 해치려고 하기 전에, 마지막에 다치는 사람이 우리 아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봤어?”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내가 서희한테 잘해주는 건 오로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고 했잖아. 그런데 넌 왜 그렇게까지 서희를 못살게 구는 거야?”
송연서는 말하고 싶었다.
자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묻고 싶었다.
지민호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 왜 자기 아들은 구해주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자신과 아들은 결국 지성훈에게 버림받은 사람이었다.
윤서희가 가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됐어, 어차피 난 아무 일도 없었잖아. 나도 이제 그만할게.”
“언니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 혼나야지.”
“오빠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야. 만약 민호가 정말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언니는 남은 인생 내내 악몽에 시달렸을걸.”
지성훈은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아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는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송연서를 몰아붙였다.
송연서는 지성훈의 말을 한 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송연서가 바라보는 곳은 오직 응급실 문 하나뿐이었다.
평소 신이나 귀신 같은 건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지민호만 무사하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도 괜찮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의사가 응급실 문을 열고 나왔다.
“다행히 칼이 심장을 비껴갔습니다. 딱 1인치 정도 차이였어요. 심장을 직접 찌르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송연서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살았다.
지민호가 살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송연서는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때 윤서희가 지성훈의 팔을 살짝 잡았다.
“성훈 오빠, 사흘 뒤면 우리 결혼식이잖아. 그리고 오빠랑 언니의 이혼 숙려 기간도 끝났으니까 이제 이혼 서류에 도장 찍을 수 있어.”
윤서희는 잠시 송연서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가 지금 너무 힘들어하니까... 조금 더 있다가 이혼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사람들한테 몇 번 더 욕먹는 건 괜찮아. 계속 내연녀라고 불려도 참을 수 있어.”
그제야 지성훈은 이혼 이야기를 떠올렸다.
“안 돼.”
지성훈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바로 가서 이혼할 거야.”
어차피 자신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송연서가 이혼을 요구할 것이었다.
이제 송연서와는 단 한 순간도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송연서는 지민호가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지성훈과 함께 구청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이혼증명서를 발급받은 바로 그날, 지성훈은 윤서희와 혼인신고까지 마쳤다.
“사흘 뒤가 결혼식이야.”
지성훈은 차갑게 경고했다.
“너랑 민호는 결혼식장에 와서 방해할 생각 하지 마. 이미 경비팀에 말해뒀어. 너희는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야.”
송연서는 손에 이혼증명서를 꼭 쥔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응.”
그 한마디뿐이었다.
안심해도 됐다.
송연서는 이미 오래전에 지성훈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으니까.
지성훈은 창백한 송연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너도 돌아가서 잘 생각해 봐.”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시간이 지나고 이번 일이 잠잠해지면, 나도 서희랑 이혼하고 다시 너와 결혼할 거야.”
“아니...”
송연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윤서희가 멀리서 지성훈을 불렀다.
“오빠! 빨리 와. 우리 행복하게 혼인신고한 모습 사진 찍어야지!”
“알았어. 지금 갈게.”
지성훈은 웃으며 윤서희에게 다가갔다.
그날부터 사흘 동안 지성훈은 윤서희와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병원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온 도시가 두 사람의 결혼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지성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민호 좀 괜찮아졌어? 요즘은 내가 상황이 좀 그래서 못 가겠어. 나중에 시간 되면 보러 갈게.]
송연서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지성훈이 윤서희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를 모두 모아 언론사에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선그룹 주식을 한 주도 남기지 않고 지승준에게 넘겼다.
그 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지민호를 데리고 갔다.
‘지성훈, 이제부터 우리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