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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후, 나는 네 사랑이 필요 없어
H시 상류층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차갑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유명한 백씨 가문 도련님이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의 집안은 물론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았다는 사실을. 훗날 그 도련님은 바라던 대로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졌다. 그 여자는 바로 나였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휴대폰으로 갑자기 동영상 하나가 전송되어 왔다. 화면 속에는 한 남녀가 서로 뒤엉킨 채 몸을 섞고 있었다. 백연우의 억눌린 숨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유난히 거칠게 흘러나왔다. [자기야, 너 정말 좋은 냄새 난다.] 여자는 마지못해 백연우를 밀어내는 듯하면서도 연신 교태 섞인 신음을 흘렸다. 나는 황급히 화면을 꺼버렸다. 새까맣게 꺼진 화면에는 눈물로 젖은 내 얼굴이 비쳤다. 나와 백연우는 학창 시절부터 결혼까지, 15년 동안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범적인 잉꼬 부부로 살아왔다. 하지만 실제 삶이 어떤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백연우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변했다는 것을. 백연우는 내가 직접 골라 준 자신의 비서와 사랑에 빠졌다. 내 눈에는 티끌 하나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백연우의 생일날, 내가 그에게 준 선물은 ‘영원히 서로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Chapters (1)
第1章
H시 상류층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차갑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유명한 백씨 가문 도련님이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의 집안은 물론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았다는 사실을.
훗날 그 도련님은 바라던 대로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졌다.
그 여자는 바로 나였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휴대폰으로 갑자기 동영상 하나가 전송되어 왔다.
화면 속에는 한 남녀가 서로 뒤엉킨 채 몸을 섞고 있었다.
백연우의 억눌린 숨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유난히 거칠게 흘러나왔다.
[자기야, 너 정말 좋은 냄새 난다.]
여자는 마지못해 백연우를 밀어내는 듯하면서도 연신 교태 섞인 신음을 흘렸다.
나는 황급히 화면을 꺼버렸다.
새까맣게 꺼진 화면에는 눈물로 젖은 내 얼굴이 비쳤다.
나와 백연우는 학창 시절부터 결혼까지, 15년 동안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범적인 잉꼬 부부로 살아왔다.
하지만 실제 삶이 어떤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백연우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변했다는 것을.
백연우는 내가 직접 골라 준 자신의 비서와 사랑에 빠졌다.
내 눈에는 티끌 하나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백연우의 생일날, 내가 그에게 준 선물은 ‘영원히 서로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제1화
화면 속 여자가 연신 신음을 흘렸다.
[백연우 진짜 대단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백연우의 억눌린 숨소리는 유난히 거칠었다.
나는 황급히 화면을 꺼버렸다.
새까만 화면에 눈물로 젖은 내 얼굴이 비쳤다.
나와 백연우는 교복에서 웨딩드레스까지, 15년 동안 변함없이 서로 사랑해 온, 모두가 부러워하는 금슬 좋은 잉꼬부부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백연우의 마음이 변한 지 이미 오래였고, 대신 내가 직접 골라준 비서를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백연우는 우리가 나눴던 사랑의 말들을 비서에게 들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
백연우가 나 몰래 비서와 아이까지 낳았을 때도 나는 울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백연우는 자신이 완벽하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접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연우의 생일날, 내가 준비한 선물은 ‘영원히 서로의 삶에서 사라져 준다’라는 이별이었다.
휴대폰을 다시 켜자, 영상은 여전히 재생되고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여자의 가느다란 신음이 뒤섞여 공간 전체가 뜨거운 기운으로 물들었다.
나는 화면 속에서 땀을 흘리는 백연우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것이 내가 15년을 사랑한 남편의 진실이었다.
내 생일에 다른 여자와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 남편.
그때 휴대폰에서 연달아 알림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모두 그 여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글자만 봐도 노골적으로 나를 도발하는 임서현의 표정이 상상됐다.
[하연지, 놀랍지? 아무리 너를 사랑하는 남자라도 참을 수 없는 법이야.]
[나는 네 외모나 학력에는 못 미치지만, 침대 위에서는 자신 있거든.]
임서현의 메시지는 쉴 새 없이 이어졌지만, 나는 이미 읽을 마음이 없어서 캡처만 하고 휴대폰을 껐다.
임서현은 내가 직접 백연우를 위해 고른 비서였다.
1년 전, 백연우와 오래 일한 비서가 그만두면서 그는 새 비서를 뽑으려 했다.
인사팀에서 추린 이력서가 백연우의 손을 거쳐 내게 넘어왔고, 그때 그는 나를 바라보며 온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연지야, 인사팀에서 괜찮다고 추린 사람들이야. 네가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골라 줘.”
나는 어이없어 웃었다.
“당신 비서 뽑는 건데 나더러 결정하라고?”
그러자 백연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안 되지. 비서는 나랑 자주 붙어 있을 사람인데, 네가 싫어하는 사람을 어떻게 써?”
백연우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품에 안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도 안은 것처럼.
결국 백연우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나는 이력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 사람으로 하자. 꽤 능숙해 보여.”
설마 1년 만에 내가 직접 고른 비서가 연적이 될 줄은 몰랐다.
테이블 위의 케이크는 방의 난방 때문에 이미 조금 녹아 있었고, ‘29’라고 적힌 초는 비뚤게 꽂혀 있었다.
이것은 백연우가 나를 버린 첫 번째 생일이었고, 우리 사이의 마지막 생일이기도 했다.
시계의 분침이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한 가닥 기대가 남아 있었다.
‘혹시 돌아올지도 몰라.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생일을 잊었을 리 없잖아.’
하지만 새벽 3시가 되어도 백연우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문자 한 통, 전화 한 통 없었고, 집에 오지도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임서현과의 채팅창을 열었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사진에는 여자가 온몸에 선명한 흔적이 남은 남자의 가슴을 베고 누워 있었다.
[네 남편 진짜 세다.]
밤새 꽤 격렬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내게 연락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걸까?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쓰라림을 억눌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정성껏 차려놓은 음식들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렸다.
한 입도 먹지 않은 케이크까지 함께.
이 모든 것을 끝낸 후, 나는 전화를 걸었다.
“이 대표, 전에 나한테 디자이너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했잖아. 생각해 봤어. 프랑스행 항공권 좀 준비해 줘.”
이성준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드디어 마음이 바뀌었구나! 예전에 네가 은퇴한다고 했을 때 내가 제일 반대했던 거 기억하지? 네 재능을 묻어두면 안 된다고! 아무튼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서 다행이야. 항공권은 이미 예약해 뒀어, 앞으로 7일 후야.]
7일 후...
제2화
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웃었다.
7일 후는 백연우의 생일이었다.
동시에 나와 백연우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렴풋이 눈을 뜨니 백연우가 내 화장대에 흩어진 화장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탓인지 백연우의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어났어? 네가 또 화장품을 어질러놔서 내가 정리했어.”
나는 백연우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연우는 항상 이렇게 다정했다.
작게는 내 화장품을 정리해 주는 것부터, 크게는 내가 놓친 생활 곳곳의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15년 동안 한결같이, 진정으로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남자가 정작 내 생일에 다른 여자와 정을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내 감정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백연우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백연우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눈 가득 애정을 담아 말했다.
“어젯밤 네 생일에 집에 못 온 건 너를 위해 반지를 맞추러 갔기 때문이야. 위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내가 온갖 노력 끝에 찾은 ‘영원의 마음’이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라고!”
잠시 멈췄다가 백연우는 다시 말했다.
“이걸로 우리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자. 연지야, 나는 영원히 너를 사랑해.”
백연우의 말을 듣고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백연우가 건넨 반지를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백연우는 애교스럽게 내 허리를 안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나는 너를 위해 밤새 반지를 만들었어. 나한테 뭔가 상으로 줄 거 없어?”
그러면서 백연우는 목소리를 낮추고, 큰 손으로 내 허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나는 표정을 담담하게 유지하며 백연우의 손을 막았다.
이렇게 뻔한 변명도, 백연우가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나는 백연우의 말을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15년 동안 백연우는 나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임서현이 나타난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결국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그저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밤새 고생했으니 피곤할 텐데, 먼저 쉬어.”
그러자 백연우는 더욱 열정적으로 나를 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마치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커다랗고 순한 강아지 같았다.
“우리 연지가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다니,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야!”
백연우가 말하고 나도 따라 웃으며 손에 있던 정교한 상자를 집어 들었다.
백연우는 상자를 받아 들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열어보려 했다.
나는 백연우의 손을 누르고 천천히 말했다.
“미리 주는 생일 선물이야. 생일에 열어봐.”
백연우는 아주 놀랐다.
“6일이나 미리 주는 선물이라고?! 지금 당장 네가 뭘 준비했는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
백연우의 얼굴에 떠오른 기쁨은 진심이었다.
우리는 평범하고 행복한 부부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백연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연우는 더욱 열심히 연기했다.
상자 안에는 지난 1년 동안 임서현이 내게 보낸 메시지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 기록, 친밀한 사진, 백연우가 임서현에게 사준 온갖 물건들...
심지어 임서현이 보낸 영상까지 나는 다 정리해서 USB에 담았다.
이것들 외에도 내가 이미 서명까지 마친 이혼 합의서도 들어 있었다.
6일 후, 백연우의 생일날 그가 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길 바랐다.
오후가 되자, 백연우가 나에게 회사로 서류를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그 서류를 놓고 왔어. 오늘 해외 자본 유치에 꼭 필요한 중요한 서류인데, 가져다줄 수 있어?]
백연우는 말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졌고, 끝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다 내 탓이야. 내가 깜빡하는 바람에 네가 여기까지 서류를 가져오게 됐잖아.]
예전에 백연우의 죄책감 어린 말을 들었다면, 나는 반드시 그를 위로했을 것이다.
회사에 한 번 다녀오는 게 뭐가 힘드냐며,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그저 가볍게 대답했을 뿐, 그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3화
이제 나와 백연우 사이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회사에 들어서자, 입구의 경비원부터 로비의 프런트, 그리고 바쁘게 오가는 직원들까지 나를 보는 순간 모두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
이것은 백연우가 특별히 요구한 것이었고, 심지어 기업 규정에까지 넣었다.
예전에 내가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백연우의 회사에 갔다가, 직원에게 무시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와 백연우는 막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사랑에 푹 빠져 서로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백연우는 일이 바빠지면 늘 제대로 밥을 챙겨 먹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를 위해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점심에 직접 준비한 도시락을 가져다주곤 했다.
처음 갔을 때 프런트 직원은 나를 몰랐고 예약도 없었다.
프런트 직원은 내 초라한 옷차림을 보고 곧바로 비웃기 시작했다.
“또 팔자 고치러 온 사람이네. 네 그 초라한 꼴 좀 봐. 우리 대표가 널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더러워지겠다!”
이 모든 것을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백연우가 똑똑히 보았다.
백연우는 순간 폭발했다.
평소 온화하던 백연우가 나에게 무례하게 말한 프런트 직원을 세게 때렸다.
“내 여자를 아무도 함부로 평가할 자격 없어!”
그 일로 백연우에게는 ‘악마 대표’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회사 주가도 계속 떨어졌다.
하지만 백연우는 이런 것들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나만 생각했다.
백연우는 모든 일이 내 감정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일 이후, 백연우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나를 빠짐없이 소개했다.
회사 대형 스크린에는 매일 내 사진이 등장하는 시간이 있었다.
백연우는 심지어 백성그룹 직원이라면 나를 보는 즉시 먼저 인사하라고 지시했다.
백연우와 내가 함께 있을 때도 직원들은 나에게 먼저 인사해야 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나를 뼛속까지 사랑했던 남자가 외도했다.
회의실 문 앞에서 나는 가볍게 노크했다.
백연우는 유리 벽 너머로 온 사람이 나인 것을 보고, 손을 들어 회의를 잠시 중단하라고 신호한 뒤 곧바로 일어나 나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내가 서류를 건네자, 백연우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대충 끄덕이며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백연우가 내 손을 잡고 한참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해준 반지, 안 꼈어?”
그 반지는 이미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그날 딱 한 번 낀 이후로 나는 빼버렸다.
“집에 두고 왔어. 집에 가서 낄게.”
그러자 백연우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그 반지가 네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았어.”
회의실 안에서 백연우와 친한 한 임원이 문틀을 두드리며, 그를 놀리듯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완전 공처가네. 다들 기다리고 있어.”
이를 보고 나는 백연우가 말하기 전에 몸을 돌려 떠났다.
백연우가 뭔가 말하려는 듯 외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회사에서 나올 때,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백 대표는 정말 연지 씨를 사랑하는구나. 두 사람이 교복 입던 학창시절부터 웨딩드레스를 입는 순간까지 정말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고 들었어!”
“맞아. 게다가 백씨 가문에서 처음에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는데, 백 대표가 죽기로 버티면서 여러 번 병원에 실려 갔다고 해. 그때 한동안 정말 난리였지.”
“연지 씨는 복도 많지. 남편이 돈도 많고 저렇게 사랑해 주잖아.”
복도 많다고.
나는 사람들의 속삭임을 묵묵히 들으며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백연우의 나에 대한 사랑을 부러워하고, 백연우의 흔들림 없는 선택을 부러워하고, 백연우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과거시제였다.
차에 타려다가, 내 어깨에 백연우의 외투가 걸쳐져 있는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
아까 백연우가 내 옷차림이 얇은 것을 보고 만나자마자 외투를 벗어 내게 걸쳐주었다.
생각 끝에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백연우도 회사에 여벌 옷 하나쯤은 필요할 테니까.
회사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나는 멀리서 임서현이 백연우의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제4화
무의식적으로 나는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회사 사람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며 짓궂은 시선을 보냈다.
심지어 임서현과 친한 사람은 대놓고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서현아, 또 대표님이랑 같이 일하는 거야?”
임서현은 그 사람을 향해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백연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그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들의 짓궂은 환호성이 더 커졌다.
그래,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백연우의 연기에 맞춰주고, 연극에 동참하며, 가짜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나만 마치 광대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속아 넘어갔고, 백연우처럼 좋은 남편을 둔 것을 혼자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임서현은 몸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 부분의 풍만한 볼륨이 그대로 드러날 듯했고, 임서현은 업무를 핑계 삼아 백연우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모두가 눈치 있게 시선을 돌리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예전에 이 장면을 봤다면, 나는 분명 백연우의 배신 때문에 히스테릭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주 평온했다.
아마도 여기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모든 것이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백연우를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오늘 밤이면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아침에 나갈 때 백연우가 나를 안고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이 내 생일인데 왜 아직 선물을 못 뜯게 하는 거야?”
나는 백연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먹을 때 같이 뜯자.”
백연우는 활짝 웃었다.
백연우는 몰랐다.
오후에 내가 떠난다는 것을.
오늘 자신의 생일이라 백연우는 모든 일을 미뤄두었다.
일주일 전에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내 생일까지 함께 보상해 주려 했다.
“어디 가고 싶어? 우리 함께 봉우산에 올라가 볼까?”
봉우산은 어린 시절 백연우와 사랑을 맹세했던 곳이었다.
우리 둘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나는 가볍게 대답하고, 목도리를 침실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가방을 백연우의 손에 쥐여주고 목도리를 가지러 갔다.
백연우가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집으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연지도 나 때문에 덜렁거리는 버릇이 생겼네.”
나는 웃었다.
돌아왔을 때, 백연우가 내 휴대폰을 꽉 쥐고 있었다.
얼굴에는 불안이 역력했다.
백연우는 내가 돌아오자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방금 어떤 남자가 전화했는데... 저녁에 비행기 타는 걸 잊지 말라고 하던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 남자는 누구야? 저녁에 어디 가는 거야?”
백연우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고, 눈에는 엄청난 공포가 서려 있었다.
마치 내가 떠나는 순간 자신도 함께 무너질 것처럼.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나를 그렇게 사랑했다면, 왜 자기 비서와 바람을 피웠을까?
백연우의 긴장한 표정을 보며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잘못 걸린 전화인 것 같아.”
그 말을 듣자 백연우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래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백연우는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해. 네가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어. 나는 정말 너를 잃을 수 없어...”
백연우는 말을 더듬어가며 자신의 마음을 쏟아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를 향한 뜨겁고도 강렬한 사랑이 묻어났다.
백연우는 연기자일 뿐만 아니라, 상대를 기만하는 일에 고수였다.
나를 속였고, 자기 자신마저 속였다.
이미 오래전에 마음이 변했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일생의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면 임서현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차는 내내 질주했다.
백연우는 내가 넋을 놓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가는 내내 온갖 익살스러운 말로 나를 웃기려 애썼다.
예전 같으면 나도 맞장구치며 함께 크게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그럴 기력이 없었다.
백연우는 그의 연기를 했고, 나는 더 이상 거기에 맞장구치지 않기로 했다.
봉우산에 도착한 후, 백연우가 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며칠 전 큰 눈이 내려서 봉우산은 지금 은백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도 눈꽃으로 장식되어 참 예뻤다.
내뱉는 입김이 우리 주위로 피어올랐다.
백연우가 내 손을 잡고 있어서 추운 줄도 몰랐다.
주위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하늘에는 점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와 백연우의 어깨를 하얗게 뒤덮었다.
제5화
우리 중 누구도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지 않았다.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나와 백연우는 약속한 적이 있었다.
같은 눈을 맞을 때마다, 서로에게 한 번씩 고백하기로.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눈 풍경을 혼자 감상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우리는 결국 함께 늙어갈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멀리서부터 무언가 굴러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내 마음속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솟구쳤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자, 커다란 바위가 똑바로 나를 향해 빠르게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쾅!
순간 온몸이 트럭에 치인 듯한 충격이 덮쳐왔다.
“아...”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에 숨을 들이켰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연지야!”
백연우는 놀란 나머지 목소리까지 갈라졌다.
백연우의 눈가는 순식간에 붉어졌고,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아? 지금 바로 병원에 데려갈게!”
나는 놀라서 일그러진 백연우의 얼굴을 보며 비웃듯 웃었다.
방금 백연우는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백연우는 충분히 나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낼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백연우는 방금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바위가 굴러오는 소리조차 무시했다.
나는 백연우가 미처 화면을 끄지 못한 휴대폰을 흘낏 내려다보았다.
채팅창 위의 저장된 이름이 보였다.
‘우리 서현이.’
정말 친근하게 부르는구나.
백연우는 이미 구조대에게 연락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대가 도착할 것이다.
내 휴대폰에 갑자기 몇 통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열어보니 임서현이 보낸 것이었다.
[연우한테 들었어. 지금 두 사람이 첫사랑 고백한 곳에 다시 갔다며?]
[오늘이 연우의 생일이지? 지난번 네 생일 때 연우는 나랑 함께 있었어. 이번엔 네가 맞춰봐. 연우가 또 나 때문에 너를 버릴까?]
나는 흘낏 보고는 휴대폰을 껐다.
백연우가 지금 어떻게 되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내 새로운 삶이 곧 시작될 것이다.
거기에는 백연우도, 임서현도, 나를 괴롭히는 어떤 일도 없을 것이다.
메시지 알림음이 특별하게 울리자, 백연우의 얼굴이 굳었다.
백연우는 즉시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담담한 것을 보고서야 백연우는 겨우 눈에 띄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백연우가 완벽하다고 자부하며 진심을 숨기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연우의 걱정스러운 표정은 휴대폰 메시지를 본 후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백연우는 급하게 걸어왔다.
내가 아직 눈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그 망설임은 미안함으로 변했다.
“회사에 갑자기 긴급회의가 열려야 하는 프로젝트가 생겼어. 내가 가야 해. 구조대는 곧 도착할 거야. 여기서 잠깐 혼자 있을 수 있지?”
백연우는 말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마치 거절당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나는 풀이 죽은 백연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백연우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급하게 달려와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기쁘게 말했다.
“우리 연지 정말 다정하네. 저녁에 돌아오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소담제과에서 케이크 사 올게. 그리고 같이 선물도 열어보자!”
말이 끝나자마자 백연우는 서둘러 차 문을 열었다.
차는 순식간에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주위는 다시 고요로 돌아갔다.
오직 눈만 소리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열어보니 역시나 임서현이었다.
이번에는 백연우와 임서현이 나눈 대화 화면을 캡처한 사진을 보내왔다.
[자기야, 깜짝 소식 알려줄게. 나 임신했어! 지금 너무 보고 싶어, 빨리 와서 나랑 있어 줘.]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고작 두 줄의 말로, 백연우는 다친 나를 얼음과 눈밭에 혼자 버려두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대화 내용을 캡처한 뒤, 임서현을 완전히 차단했다.
비행기 출발까지 3시간이 남았다.
이제 정말 떠날 시간이었다.
공항에 도착한 나는 미리 저장해둔 캡처를 백연우에게 모조리 보냈다.
그리고 한마디만 남겼다.
[생일 선물 잊지 말고 확인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