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도 못 쥐는 내가 널 쓰러뜨렸어

GoodNovel Completed

우리가 만난 지 7년째 되던 해, 고한결은 마침내 팀을 이끌고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런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원래 내 것이었던 프러포즈 반지를 다른 여자의 손가락에 끼웠다. “손이 차다길래 그냥 끼워 준 거야. 괜찮지?” 고한결은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 최고의 영광을 상징하는 반지를 프러포즈 반지로 삼아 직접 내 손가락에 끼워 주겠다고. 그런데 지금은 새파랗게 어린 여자가 고한결의 뒤에 쭈뼛거리며 숨어서 자기 약지에 끼인 헐렁해서 볼품없는 반지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나는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넋을 잃고 고한결을 바라보았다.

Chapters (1)

第1章

우리가 만난 지 7년째 되던 해, 고한결은 마침내 팀을 이끌고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런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원래 내 것이었던 프러포즈 반지를 다른 여자의 손가락에 끼웠다. “손이 차다길래 그냥 끼워 준 거야. 괜찮지?” 고한결은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 최고의 영광을 상징하는 반지를 프러포즈 반지로 삼아 직접 내 손가락에 끼워 주겠다고. 그런데 지금은 새파랗게 어린 여자가 고한결의 뒤에 쭈뼛거리며 숨어서 자기 약지에 끼인 헐렁해서 볼품없는 반지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나는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넋을 잃고 고한결을 바라보았다. 제1화 “7년 전에 나한테 약속했던 거잖아. 그걸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저 사람한테 줘버린다고?” 고한결이 나를 무심하게 한 번 바라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깟 반지 하나 가지고 뭘 그래?” “너 이제 마우스도 못 쥐잖아. 그 반지 네가 끼고 있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은 고한결은 시선 끝으로 거의 망가져 버린 내 오른손을 정확히 찔렀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 버렸다. 문밖에서 들려오던 환호성은 갑자기 날카롭게 나의 귀를 찔렀다. 고한결은 태연하게 샴페인 한 병을 따서 손유진이 손에 든 잔에 따라 주었다. “지난달에 너 손 다쳤던 거 결국 재발해서 은퇴를 발표했던 날 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고한결은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나 PC방에서 유진이랑 밤새 듀오 돌렸어.” 머릿속에서 웅웅 하는 소리가 울렸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고한결을 바라보았다. 그날 나는 혼자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다. 굵고 긴 바늘이 뼈 사이로 파고드는 통증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너무 아파 몸을 부들부들 떠는 와중에도 나는 밤새 고한결에게 수없이 많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고한결이 보낸 답장은 고작 한 줄이었다. [지난 경기 복기 중이라 바빠.] “어쩔 수 없잖아. 너는 이제 게임을 못 하고 랭킹은 올려야 하니까 같이할 사람이 필요했어.” 고한결은 대수롭지 않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우리 사이가 사이인 만큼, 너에게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게.” “은퇴는 했어도 팀에 남아서 다른 일 하면 돼. 월급은 두 배로 올려 줄 거고, 연말 보너스도 빠짐없이 챙겨 줄게.” 불과 30분 전만 해도 고한결은 내 손을 잡고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우승 트로피를 함께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우리 청춘의 7년을 장식할 가장 완벽한 마침표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나는 멍하니 고한결을 바라보았다. “이거 바람이잖아!” 고한결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더없이 다정한 손길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가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바람이라고 할 수 있어?” 고한결은 마치 철없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원래는 계속 숨기려고 했는데 쟤가 삐쳤잖아. 그러니까 좀 달래 줘야지.” “넌 마음도 넓고 어린애도 아니잖아. 그냥 계속 내 곁에 있어. 예전처럼 똑같이 대해 줄게.” “그래도 정 네가 떠나야겠다면 나도 붙잡지 않을게. 네 마음대로 해.” 말도 안 되는 고한결의 말에 나는 속이 뒤집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고한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곁에 있던 진열장에서 방금 딴 우승 트로피를 집어 들어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꺼져!” 유리 파편과 금속 받침대가 산산조각 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곧 손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놀라 고한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고한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더니 눈에는 조금도 숨기지 않은 혐오감이 스쳤다. “너는 생떼 쓰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상대하기도 귀찮으니까 알아서 해.” 고한결은 겁에 질린 손유진을 감싸안은 채 몸을 돌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오늘 우승 파티는 우리끼리 갈 테니까, 너는 여기서 머리 좀 식혀.” 문을 다시 열고 고함지르듯 이야기하다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버렸다. 방 안은 텅 비었고 밖에서는 모두가 그들만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나만 바닥에 주저앉아 공허한 눈빛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참 야속하게도 오른쪽 손목의 오래된 부상이 욱신거려 더 서럽기만 했다. 7년 전, 나는 고한결과 비좁은 무허가 PC방에 웅크리고 있었다. 둘이서 컵라면 하나를 나눠 먹었고, 삶은 달걀 하나를 추가하는 것조차 남은 통장 잔액을 헤아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고한결은 내 옷을 사 줄 돈을 모으기 위해 혼자 불법적인 대회에 나간 적도 있었다. 그때 시비가 붙어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를 정도로 얻어맞기도 했다. 그날 고한결은 피범벅이 된 얼굴로, 따낸 십몇만 원을 현금으로 품에 꼭 끌어안고 지켰다가 내 손에 통째로 쥐여 주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고한결의 눈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내가 세계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잖아? 그렇게 되면 그 우승은 내 것이 아니라 온전히 네 거야.” 그때의 맹세가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캠프는 이글루가 된 것처럼 추웠고, 나는 웅크린 채 두 팔로 내 몸을 꼭 끌어안았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을 애써 지워 보려고 했다. 그러던 순간,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더니 고한결이 좀처럼 하지 않던 라이브 방송을 켰다. 화면에는 다른 사람 없이 손유진 혼자 있었다. 마이크를 통해 화면 밖에서 손유진을 달래는 고한결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내가 걔한테 묶여 있었던 거야. 속상해하지 마. 반지는 처음부터 너한테 주려고 했던 거니까.] 부러움 가득한 댓글이 화면을 가득 메우며 빠르게 올라갔다. 내 심장은 칼로 갈기갈기 찢기듯 더더욱 아팠고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더는 그 꼴을 못 볼 것 같아 손목을 부들부들 떨며 방송에서 나가려고 했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바로 그 순간, 화면에서 거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고한결이 원래 내 것이었던 프러포즈 반지를 들고 한쪽 무릎을 꿇더니 다른 여자에게 청혼하는 장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제2화 나는 떨리는 손으로 고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요란한 환호성 속에서 왜 나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에게 청혼했느냐고 물었다. 웃음기가 조금 섞여 있는 고한결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렸다. [팀에 화제성이 필요해. 팬들은 내가 어린 여자랑 함께 있는 걸 좋아하거든.] [다연아, 대표 사모님이 되고 싶으면 그릇을 좀 키워.] ‘그릇을 좀 키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3년 전, 팀이 가장 가난했던 시절, 어느 사업가가 20억을 투자해 고한결을 e스포츠계의 슈퍼스타로 띄워 주겠다고 했다. 물론 조건이 없을 리는 없었고, 그 조건은 나를 버리는 것이었다. 고한결은 그 자리에서 수표를 찢어 버렸다. 밖에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고한결은 고열에 시달리는 나를 업고 흙탕물 속을 비틀거리며 이를 악물고 걸었다. “내 여자 하나 못 지키면서 이딴 돈 벌어서 뭐 해?” 지난 일들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고한결의 설명만큼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휴게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보이는 눈앞의 광경에 난 숨이 턱하고 막혔다. 벌거벗은 두 몸이 뒤엉켜 있었고 바닥에는 피임 도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윽고 손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고한결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정신을 차린 뒤에야 손유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먼저 나가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내게 지시했다. “물 한 잔 떠 와.” “가는 길에 바닥에 있는 것도 좀 치워. 도우미 아주머니가 보면 곤란하잖아.” 내가 움직이지 않자 고한결은 그제야 뭔가 떠오른 듯 담담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어제 취해서 그런 거야. 쩨쩨하게 굴지 마.” 나는 눈시울이 벌게진 채 물잔을 들어 고한결의 얼굴에 그대로 끼얹었다. 그리고 손유진을 캠프에서 내보내라고 몰아붙였다. 고한결은 몹시 충격을 받고 분노하는 나를 보며 애완동물을 달래듯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내일 다른 데로 보낼게. 그만해, 보기 흉해.” 억울해서였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목숨을 걸고 함께 버텨 온 7년이 아까워서였을지도 몰랐다. 나는 적어도 마지막 선만큼은 지켰다고 자신을 속였다. 내 생일날 창밖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나는 고한결이 가장 좋아하는 국을 끓여 캠프 건물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며 꼬박 두 시간을 서 있었다. 고한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고 싶었고, 나 자신에게도 물러설 곳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광장 대형 전광판을 뒤덮은 생중계였다. 고한결은 거대한 놀이공원 하나를 통째로 빌렸고, 눈부신 불꽃놀이 아래에서 진즉 내보내야 했을 손유진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이윽고 국물이 빗물과 섞여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내가 이를 악물고 참고 비위를 맞춰 온 모든 것들이 웃음거리가 된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고한결과 손유진의 사진과 폭로 자료를 연예 매체에 넘겼다. 고한결에게 따끔하게 한 번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한결은 내가 낸 기사를 덮어 버리고, 되레 나를 끈질기게 매달리는 미친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온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에게 욕을 먹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팬들은 내 집 주소까지 알아내 오물을 뿌리고 썩은 달걀을 던졌다. 그러던 어느날 고한결이 나를 꼭대기 층 사무실로 부르더니 내 눈앞에서 7년 전 무허가 PC방에서 함께 따낸 첫 메달을 꺼내게 했다. 싸구려라 칠이 벗겨져 있었지만, 한때 우리에게는 보물과도 같았던 물건이었다. 고한결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소파에 앉은 손유진에게 넘겼다. “유진이네 집 개가 마침 목줄에 달 펜던트가 없대. 크기 보니까 이 메달에 딱 맞겠더라.” 고한결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평온하게 말했다. “말을 안 들으면서 남겠다고 했잖아. 그럼 이런 옛날 물건은 갖고 있어 봐야 소용없는 거 아니겠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겼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려들어 두 사람의 차 문을 붙잡고 메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경호원들이 달려와 나를 바닥에 꽉 짓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고한결은 그 자리에서 경찰을 부르고는 세상에 내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발표한 뒤, 나를 유치장에 하룻밤 가둬 두었다. 다음 날 아침 풀려난 나는 미친 사람처럼 고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53통을 걸어서야 마침내 전화가 연결됐고 들려온 것은 다름 아닌 손유진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였다. [선배님, 오빠 지금 내 머리 말려 주고 있어요. 그 낡은 메달은 우리 집 강아지도 싫어하길래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그 말을 남기고는 손유진은 전화를 끊었다. 이윽고 나는 위가 뒤틀리며 아프기 시작했고 너무 아파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가운데, 나는 망가진 오른손을 뻣뻣하게 뻗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채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 하나를 주워들었다. 제3화 코를 찌르는 병원 소독약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한결은 병상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며 은행 카드 한 장을 던졌다. “어제는 내가 말이 좀 심했던 것 같아.” 고한결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못마땅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병원비는 내가 대 줄게. 남기로 했으면 얌전히 있어. 이렇게 자신을 망치지 만들지 말고.” 나는 베개에 기대어 그저 고한결을 바라보았다. 고한결의 꿈을 이뤄 주고 세계 무대에 세워주기 위해, 나는 e스포츠 전술을 처음부터 배웠고, 24시간 내내 게임에 매달리며 완전히 몰두했다. 대회 참가비를 마련하려고 보름 내리 밤을 새워 돈을 받고 랭킹을 올렸다. 오른손의 건초염은 점점 악화되어 젓가락조차 쥐지 못할 만큼 아팠다. 그때 고한결은 찐빵처럼 부어오른 내 손을 받쳐 들고 부들부들 떨며 울더니 눈이 벌게진 채 맹세했다. “다연아, 네 손은 곧 내 목숨과도 같아.” 나는 멍하니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때 네가 그랬잖아. 내 손이 네 목숨과도 같은 거라고.” “지금 이렇게 망가졌는데, 왜 너는 조금도 안 아픈 거야?” 고한결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짜증스럽게 내 말을 끊었다. “자꾸 옛날 일로 나를 옭아매지 마. 사람은 과거가 아니라 앞을 보고 달려야 하는 거야.” 지독하게 매정한 말에 나는 시선을 돌려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꼬박 7년 동안 못 한 것을 고한결은 해낸 것이었다. 손유진이 사라지자 고한결은 이번에는 갓 성인이 된 연습생을 데려왔다. 그 연습생은 빛이 바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겁이 많고 순수해 보이는 모습이 놀란 새끼 사슴 같았다. 나를 보자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몸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선배님, 죄송해요.” “저는 윤아린이라고 해요. 그냥 프로가 되고 싶었을 뿐이지, 두 분 사이를 망치러 온 게 아니에요.” 미처 입을 열기도 전, 고한결은 성큼성큼 다가와 나의 반대편에 섰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극도로 차가웠다. “얘는 그냥 순수한 신인이야. 아무것도 몰라. 내가 억지로 끌어 준 거고.” “화가 나면 분풀이는 나한테 해. 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이 바닥에서 다시는 발 못 붙이게 해 줄 거야.” 윤아린은 확실히 달랐다. 결벽증이 매우 심한 고한결은 예전에 남이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허리를 깊이 숙여 자신의 마우스를 쓰는 법을 손수 가르쳐 주고 있었다. 캠프를 새로 정하면서 윤아린을 위해 호화로운 개인 연습실까지 만들어 주었다. 오른손에 경련이 난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어찌할 바를 몰랐고, 끊임없이 괴롭히는 고통에 난 몸을 제대로 펼 수가 없었다. 물이 새는 지하실에서 함께 살던 시절, 고한결은 안쓰러운 듯 나를 끌어안고 돈을 벌면 꼭 내가 가장 원하는 삶을 주겠다고 했다. 우리만의 집을 하나 사서 행복하게 살자고 얘기했었다. 그 뒤에 정말로 돈이 생겼지만 고한결은 늘 자금을 팀 운영에 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큰 그림을 보는 고한결을 이해했고 이에 대해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제 와서야 알았다. 고한결은 잊은 게 아니라 그저 그 약속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지켰던 것이었다. 고한결은 윤아린에게 집 한 채를 사 주었고, 등기부등본을 건네는 목소리는 꿀 떨어지게 달달했다. “받아. 앞으로 네 집은 내가 지켜 줄게.” 윤아린은 고개를 들어 고한결을 바라보며 옅은 보조개를 지었다. 나는 윤아린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눈가에 번진 보조개와 수줍은 표정, 기쁜 얼굴로 고한결의 품에 안기는 모습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나의 눈에 담았다. 7년을 사랑한 끝에 나는 고한결이 윤아린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보여 주기 식도 아니고 계약도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그 깨달음이 나를 완전히 부숴 버렸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려들어 등기부등본을 빼앗아 찢어 버리고, 발작하듯 고한결을 붙잡고 마구 잡아당겼다. “나를 곁에 두겠다고 했으면서 왜 또 새 여자를 만나?” “너 설마 완전히 잊은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 고한결은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에 등이 책상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고한결은 경비원에게 지시했다. “정신병이 또 도졌어요. 창고에 가두고 당장 정신병원에 연락해서 데려가라고 하세요!” 나는 캄캄한 창고에 갇혔다. 창고의 사방 벽에는 우리가 함께 땄던 낡은 트로피들이 가득했다. 멘탈이 무너지기 직전 나는 또 한 번 오른쪽 손목을 그었다. 피가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으나 그 아픔에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고한결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바닥에 흥건한 피와 핏기 하나 없는 나를 보더니 그저 피식 웃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또 울고불고하더니 이제는 죽는시늉까지 해?” 고한결이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망가진 손목을 그어서 누구를 겁주려고?” “정말 죽어서 나한테 죄책감을 주고 싶으면 이 정도로는 안 돼. 다음엔 높은 곳에 가서 뛰어내리든지 해.” 나는 무심코 고한결을 바라보자 거칠게 오르내리던 가슴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눈 속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나는 무의식중에 나직하게 한마디했다. “그래.” 몸을 돌려 창고 창틀에 올라선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3층에서 뒤로 몸을 던졌다. 제4화 나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는 온몸의 뼈 대부분에 골절이 생긴 데다가 손목에 물이 차버려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신경도 영구적으로 손상되어 이제는 다시는 마우스는 물론이고 그 어떤 물건도 힘주어 제대로 쥘 수 없게 되었다. 병상 옆에 앉아 있던 고한결의 안색이 어두웠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손이 이미...” 고한결은 말을 잇다 말고 멈췄다. 아마 본인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이번이 내가 고한결을 위해 두 번째로 손을 망가뜨린 날이었다. 그 후의 나는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빈 껍데기가 된 것 같았다. 처음에 고한결은 내 곁을 지켜 주었지만 그의 인내심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찾아오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는 윤아린까지 데리고 왔다. 윤아린은 팀이 찍은 프로필 사진을 내 앞에 내밀었다. “선배님, 손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들었어요. 기념으로 간직하시라고 제가 일부러 단체 사진으로 가져왔어요.”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였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을 뿐인데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던 미지근한 물컵이 넘어졌다. 그 바람에 물이 새 유니폼 위로 튀자 윤아린은 눈시울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고한결은 젖어서 차가워진 수건을 내 얼굴에 세차게 내던지며 소리를 쳤다. “정신 좀 차려! 네가 스스로 미쳐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손을 망친 거잖아! 그걸 왜 아린이한테 화풀이해!” “게다가 애초에 네 그 손으로는 경기도 못 뛰잖아. 망가졌으면 망가진 거지!” 목소리에는 짙은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지금 네가 어떤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는지 좀 봐봐.”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 배경화면 속, 한때 젊고 아름다운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우승을 차지해서 빛나던 순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병실의 반사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창백하고 등이 굽은 채 오른손에는 두꺼운 깁스를 하고 있었다. 꼭 죽어가는 개처럼 흉측한 모습이었다. ‘못생겼네. 너무 흉해.’ 그런 생각이 들자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이내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계속 몸을 떨었다. 고한결이 조금 마음이 약해진 듯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나는 고한결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고한결, 나 후회해.” 그 말에 고한결이 멈칫했다. “뭘?” “내 지분 현금으로 정산해 줘. 나 떠날 거야. 우리 헤어져.” 고한결이 굳어 버렸다. 나는 이불을 걷어 내리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고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바람에 신발을 신을 겨를조차 없었다. 고한결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붙잡았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지분 정리 법적 절차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일단 몸부터 회복...” 나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사람처럼 고한결의 손을 세차게 뿌리치고는 한 손으로 손등에 꽂혀 있던 수액 바늘을 거칠게 뽑았다. 피가 순식간에 솟구쳤다. “난 나갈 거야! 지금 당장 갈 거라고!” 나는 한 손으로 옷 몇 벌을 마구 구겨 넣어 낡고 볼품없는 캔버스 가방에 쑤셔 넣었다. ‘빨리 가야 해. 내 인생에는 아직 앞으로도 수많은 7년이 남아 있어.’ 고한결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다시 한번 날 말렸다.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 없어. 지분 정리 절차 아직 승인 안 났어.” 나는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럼 내 계좌로 입금해!”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문 앞에서 휘청거리다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고한결이 갑자기 비웃듯 웃었다. “그래.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오늘 당장 나가.” 7년의 청춘은 결국 얇은 가방 하나에 전부 들어가 버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병원 밖으로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한결은 복도에 서서 절뚝거리며 사라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고한결은 윤아린을 곁에 두고 선수로 키워오다가 한 달쯤 지나자 조금 싫증이 났다. 강도 높은 경기를 할 때면 윤아린은 소리를 지르고 실수를 연발하는 데다, 끊임없이 자신을 지켜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고한결은 짜증이 난 듯 윤아린을 후보 선수로 강등시켰다. 그 무렵 외모가 뛰어난 여자 스트리머가 고한결을 바짝 따라다녔다. 고한결은 꽤 신선하고 자극적이라는 생각에 한번 만나 보았다. 잠깐의 신선함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어린 여자 팬으로 바꿨다. 그런 자극적인 느낌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만큼 질리는 것도 빨랐다. 고한결은 번화한 유흥가를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 사이 팀 성적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여러 여자의 침대를 전전했고 자신도 몇 명의 여자와 잤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중요한 연습 경기가 열렸고, 고한결이 상대팀 다섯 명에게 포위당한 순간이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한결은 무의식적으로 수천 번도 넘게 외쳤던 전술 암호를 소리쳤다. “다연아, 뒤로!”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고, 화면은 순식간에 캐릭터의 죽음을 알리는 흑백 화면으로 변했다. 고한결은 벌떡 헤드셋을 벗더니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빈자리를 하염없이 보던 고한결의 마음속에 마치 심장이 도려내진 것처럼 공허함이 물밀듯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