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없는 결혼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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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 민윤희는 마치 유령처럼 존재감 없는 남편과 살았다. 아이를 낳던 날에도 남편 이정호는 곁에 없었다. 과다 출혈로 몇 번이나 의식을 잃으면서도 민윤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끝내 돌아온 것은 연결되지 않는 통화음뿐이었다. 의료진이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정신을 붙들었고, 민윤희는 떨리는 손으로 응급 수술 동의서에 제 이름을 적어야 했다. 아이가 열이 나서 40도까지 오르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이정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민윤희는 홀로 아이를 품에 안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사흘 밤낮을 뜬눈으로 버티다 끝내 기력이 다해 병원 복도에 쓰러졌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날에도, 그는 여전히 곁에 없었다. 차갑게 식은 부모님의 유골함을 품에 안고 돌아온 민윤희에게 큰아버지는 다짜고짜 뺨부터 올려붙였다. 남편 마음 하나 붙잡지 못한 탓에, 평생 체면을 지키며 살아온 부모가 사위의 마지막 배웅조차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며 몰아세웠다.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거라는 모진 말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쉰여덟이 되던 해. 말기 암을 선고받은 민윤희의 삶도...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Chapters (1)

第1章

전생에서 민윤희는 마치 유령처럼 존재감 없는 남편과 살았다. 아이를 낳던 날에도 남편 이정호는 곁에 없었다. 과다 출혈로 몇 번이나 의식을 잃으면서도 민윤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끝내 돌아온 것은 연결되지 않는 통화음뿐이었다. 의료진이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정신을 붙들었고, 민윤희는 떨리는 손으로 응급 수술 동의서에 제 이름을 적어야 했다. 아이가 열이 나서 40도까지 오르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이정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민윤희는 홀로 아이를 품에 안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사흘 밤낮을 뜬눈으로 버티다 끝내 기력이 다해 병원 복도에 쓰러졌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날에도, 그는 여전히 곁에 없었다. 차갑게 식은 부모님의 유골함을 품에 안고 돌아온 민윤희에게 큰아버지는 다짜고짜 뺨부터 올려붙였다. 남편 마음 하나 붙잡지 못한 탓에, 평생 체면을 지키며 살아온 부모가 사위의 마지막 배웅조차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며 몰아세웠다.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거라는 모진 말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쉰여덟이 되던 해. 말기 암을 선고받은 민윤희의 삶도...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제1화 요양보호사가 민윤희에게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창밖의 잎 마른 오동나무를 바라보던 민윤희는 희미하게 남은 기대를 끌어모아 이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실수로 연결된 듯했다.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소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하게 재촉하는 두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 케이크 다 먹으면 아진 이모랑 우리 넷이 가족사진 찍자.] “그래.” 민윤희의 가슴 깊숙한 곳이 쿡 찔렸다. 손에서 미끄러진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 민윤희는 바닷속 깊이 침잠하는 외로운 배처럼 눈을 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민윤희는 27살로 돌아와 있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이혼 조정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그 서류를 들고 남편의 잊지 못한 첫사랑, 임아진을 찾아갔다. “이정호와 이혼하기로 했어요.” 민윤희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합의서를 탁자 위에 놓았다. “이정호에게 이 서류에 서명만 받아 주면, HT그룹 안주인 자리는 임아진 씨 거예요.” 임아진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정호와 결혼한 지 7년이나 됐고 아이도 둘이잖아요. 정말 그 자리를 나한테 넘길 수 있어요?” 민윤희의 머릿속에 전생에서 겪었던 참혹한 기억들이 지나갔다. 민윤희는 담담하게 답했다. “이정호는 아직 임아진 씨를 잊지 못했고, 아이들도 임아진 씨를 더 좋아해요. 내가 물러나면 모두가 원하는 대로 되겠죠.” 마침 민윤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아들 이재준과 딸 이우희의 찢어질 듯한 울음이 쏟아졌다. [엄마, 빨리 와서 살려줘!] [나쁜 아저씨가 우리를 때려죽이려고 해. 으아앙...] 곧이어 납치범의 싸늘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이 둘 다 내 손에 있어! 살리고 싶으면 20억 원을 준비해. 안 그러면 내가...] “그럼 죽여요.” 납치범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민윤희는 전화를 끊었다. 지켜보던 임아진의 표정이 굳었다. “재준이랑 우희가 살려 달라고 한 것 같은데, 구하러 안 가요?” 민윤희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장난 전화예요.” 전생의 민윤희는 아이들이 납치됐다는 말을 듣고도 집안의 돈줄을 쥔 이정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사정한 끝에 가까스로 20억 원을 마련했다. 약속 장소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아이들 걱정에 정신을 놓은 탓에 가드레일까지 들이받았다. 이마가 터져 피가 흐를 정도였다. 하지만 끝에 가서 알게 된 진실은... 납치극은 두 아이가 직접 꾸민 자작극이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그런 짓을 벌인 이유는 민윤희에게서 20억 원을 받아 임아진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같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민윤희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온 민윤희는 며칠 동안 이정호와 두 아이를 위해 뜨던 목도리와 미리 준비해 둔 크리스마스 선물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남김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민윤희와 이정호의 결혼은 집안끼리 맺은 정략결혼이었다. 임아진은 이정호가 평생 놓지 못한 첫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한때 결혼을 약속할 만큼 가까웠다. 하지만 임아진의 부모가 운영하는 LB그룹이 비자금 조성과 불법 자금 거래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자, 이정호의 부모는 집안의 배경을 문제 삼아 두 사람의 교제를 강제로 끝냈다. 그 뒤 임아진은 유학을 떠났고, 이정호는 반년 내내 폐인처럼 지냈다. 그제야 이정호는 민씨 집안과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였다. 결혼식 날, 이정호는 딱딱한 목소리로 못 박았다. “우리는 집안끼리 필요해서 맺어진 사이야. HT그룹 안주인이라는 자리 말고는 아무것도 줄 수 없어.” 민윤희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철없는 기대가 남아 있었다. 사람 마음은 정성을 들이면 움직인다고 믿었다. 더 많이 베풀고 더 오래 참으면 얼음장 같은 결혼도 언젠가는 따뜻해질 줄 알았다. 그래서 이정호가 좋아하는 음식을 배웠고, 셔츠를 때마다 미리 한 장 한 장 다려 두었으며,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조리 외웠다. 하지만 이정호가 민윤희에게 내준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의무처럼 갖는 잠자리뿐이었다. 마음만큼은 한 번도 민윤희를 향하지 않았다.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으며, 민윤희는 물론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임아진이 돌아온 뒤에는 미련을 끊지 못한 채 두 아이까지 데리고 임아진과 더 가까워졌다. 삶을 다시 얻은 지금... 민윤희는 사랑 없는 결혼에 제 인생을 또다시 묻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이정호의 서늘하고 거리감 어린 목소리가 꽂혔다. “뭐 해?” 제2화 민윤희는 무려 보름 만에 보는 남자를 힐끗 올려다보고 무심히 답했다. “집이 너무 어수선해서 정리 중이야.” 이정호는 달라진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휑해진 거실을 한 차례 둘러본 뒤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재준이랑 우희는?” 말이 끝나기 전에, 현관문이 쾅 열리며 주먹을 꼭 쥔 작은 아이 둘이 뛰어 들어왔다. 임아진도 아이들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우희는 눈가가 벌게진 채 울먹였다. “나쁜 엄마! 우리가 죽든 말든 내버려뒀어!” 재준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악을 썼다. “아진 이모가 제때 돈을 들고 와 주지 않았으면 나쁜 사람들이 우리를 죽였을 거야! 엄마는 우리가 죽어도 상관없잖아! 엄마 자격도 없어!” 이정호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집 안 공기까지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이정호는 민윤희를 향해 날 선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정호야, 윤희 씨 탓하지 마.” 임아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알맞게 꾸며 냈다. “아까 카페에서 우연히 윤희 씨를 만났어. 전화받는 걸 들었는데 납치라는 말이 나오더라. 윤희 씨는 장난이라고 했으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봐.”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아이들 위치를 알아봤어. 찾아갔더니 재준이랑 우희가 창고 천장에 매달린 채 맞고 있더라.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도 다 쉬었고...” 임아진은 말끝에 미안한 눈으로 민윤희를 바라봤다. 마치 친엄마가 할 일을 가로챈 사람처럼 굴었다. 이정호의 표정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이정호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민윤희를 노려봤다. “내가 아이들을 맡겼더니 이런 식으로 돌본 거야?” 민윤희는 미간을 세게 좁혔다. 눌러 두었던 분노가 목소리에 묻어났다. “납치는 거짓말이야. 아이들이 직접 꾸민 일이라고...” “아니야!” 우희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구하러 오지 않은 것도 모자라서 우리한테 누명까지 씌워!” “아빠, 엄마가 거짓말하는 거야. 책임지기 싫어서 저러는 거라고!” 민윤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재준, 이우희! 엄마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사실대로 말해!” 아이들이 끝까지 부인하자 민윤희는 핸드폰을 빼앗으려 다가갔다. 임아진의 선물을 사려 했다는 증거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만해!” 이정호가 민윤희의 말을 끊었다. “7살짜리 애들이 납치극을 꾸몄다고?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도 네가 엄마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엄마 자격이 없다고?” 민윤희의 눈가가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당신은? 아이들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아빠 노릇을 몇 번이나 했는데?” 팽팽한 긴장이 더 거칠어지자 임아진이 급히 끼어들었다. “그만해, 정호야. 다행히 아이들도 조금 다친 게 전부잖아. 윤희 씨까지 몰아세우지는 마.” 임아진이 달래자 이정호는 겨우 화를 억눌렀다. 민윤희를 차갑게 쏘아본 뒤 두 아이를 안고 돌아섰다. 임아진은 민윤희 곁으로 다가와 웃음 섞인 눈으로 속삭였다. “윤희 씨, 원망하지 말아요. 이혼하려고 했잖아요. 정호가 윤희 씨를 싫어할수록 더 빨리 자유로워질 테니까.” ... 저녁이 되자 두 아이는 임아진의 손을 붙잡고 기어이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졸랐다. 식탁에는 온갖 해산물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도미찜과 간장새우, 대게찜까지. 이정호는 비닐장갑을 끼고 대게 한 마리를 집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껍데기를 벗겨 살을 발라낸 뒤 임아진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대게는 찐 걸 좋아했지? 여기 맛이 어떤지 먹어 봐.” 이재준과 이우희도 대게를 하나씩 집어 들고 정신없이 먹었다. 다정하기만 한 풍경을 바라보며 민윤희는 입가에 희미한 자조를 걸었다. 민윤희가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해산물은 입에도 댈 수 없고, 특히 게는 위험하다고 말한 게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바람에 쓸려 간 듯 이정호와 아이들의 마음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민윤희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일어나려던 때, 임아진이 이혼 조정 합의서를 꺼내 마지막 서명란을 펼쳤다. “정호야, 깜빡할 뻔했네.” “아동용품을 한꺼번에 들여오려는데 관계인 확인 서명이 필요하대. 여기...” 제3화 임아진이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이정호는 비닐장갑을 벗었다. 만년필을 건네받아 서명란에 제 이름을 적었다. “이렇게 바로 해도 돼? 내용은 안 봐?” 임아진은 뻔히 알면서도 묻고, 일부러 민윤희 쪽을 흘겨봤다. 이정호가 옅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것까지 따져야 해?” “아진 이모, 나도 장난감 사 줘!” 이우희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내 방을 인형으로 꽉 채우고 싶어. 엄마가 만든 건 다 못생겨서 싫단 말이야!” “나도!” 이재준도 신이 나서 손을 들었다. “나는 변신 로봇 피규어 백 개 놓을 거야!” 민윤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너희 둘 다 천식이 있어. 방에 장난감을 너무 많이 두면 목숨도 위험할 수 있어.” 임아진은 잠깐 멈칫했다가 웃었다. “가장 안전한 소재로 골라 줄게요. 윤희 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정호도 거들었다. “아진이 고르는 건 믿어도 돼.” 이정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재준과 이우희는 활짝 웃으며 임아진의 양 볼에 입을 맞췄다. “와! 아진 이모가 최고야!” “이모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 이정호는 세 사람이 웃고 떠드는 내내 더없이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민윤희에게는 그 광경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전생의 민윤희는 장난감이 아이들의 천식을 자극할까 봐 친환경 소재를 하나하나 골라 직접 만들었다. 작업 중에 손을 다치거나 까져도 아프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성을 쏟아 만든 물건은 아이들에게 아무 가치도 없었다. 민윤희는 홀로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아진이 이혼 조정 합의서를 들고 찾아왔다. “정호가 서명했어요. 이제 와서 마음 바꾸지는 않겠죠?” “물론이죠.” 민윤희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법원 결정이 확정되는 날 바로 떠날 거예요.” ... 다음 날, 임아진은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가 장난감을 한가득 사 왔다. 이재준과 이우희는 임아진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들뜬 얼굴로 제 방을 꾸몄다. 복도를 지나던 민윤희는 아이들이 자신이 손수 쌓아 준 블록 성과 천으로 꿰맨 인형을 하나씩 쓰레기통에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복도에서 무거운 물건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삿짐 직원 몇 명이 새 플로어 스탠드와 화장대, 거실 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아이들이랑 장난감 사러 갔다가 예쁜 가구가 보여서 같이 사 왔어.” 임아진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이정호를 바라봤다. “집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 날 잡아서 전부 새로 바꿔서 꾸미는 건 어때?” 이정호는 고민하지도 않고 답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민윤희의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 집에 놓인 모든 것은 민윤희가 7년에 걸쳐 하나씩 정성껏 꾸민 것이었다. 이제 임아진이 ‘딱딱하다’라고 한마디한 것만으로 이 집에서 민윤희가 했던 일들은 전부 부정당했다. 이후 임아진은 인테리어 공사를 지켜봐야 한다는 핑계로 저택에 눌러앉았다. 이혼 조정 합의서를 손에 넣은 민윤희는 아예 집안일에서 손을 뗐다.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더는 관여하지 않았다. 열흘이고 보름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던 이정호가 매일 정해진 때에 귀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네 사람이 좁은 주방에 모여 음식을 만들다가 간장을 사방에 흘리고도 즐겁게 웃는 모습도 보았다. 심한 결벽증이 있는 이정호에게 임아진이 씻지도 않은 딸기를 내밀자,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받아먹는 모습도 보았다. 시간에 철저한 이정호가 임아진과 아이들을 위해 새벽까지 영화를 보고 소파에서 다음 날 정오까지 잠든 탓에, 중요한 회의까지 취소하는 모습도 보았다. 민윤희는 마침내 알았다. 이정호의 까다로운 기준은 오직 민윤희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이정호는 얼마든지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다정하게 챙길 줄도 알았고, 세워 둔 원칙도 상대를 위해 깨뜨릴 수 있었다. ... 어느 깊은 밤, 민윤희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며칠째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남자가 민윤희 앞에 섰다. 차가운 분노가 눈 속에서 일렁였다.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 이정호가 내려다보며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영문을 몰라 하던 민윤희 앞에 이정호가 담요 한 장을 내던졌다. “요즘 네가 집안일에 손 놓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건 넘어갔어. 하지만 어떻게 그 화를 아이한테 풀 수가 있지?” “우희가 천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며칠째 빨지 않은 담요를 덮어줘? 우희가 죽을 뻔했어!” 민윤희는 눈을 크게 떴다. 이 담요는 2년 전, 자신이 수없이 비교한 끝에 고른 고밀도 순면 제품이었다. 고작 며칠 빨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식 발작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우희가 발작은 이 담요 때문일 수 없어.” 민윤희는 차갑게 맞받았다. “차라리 임아진 씨가 사 온 장난감부터 확인해 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준이 울며 달려왔다. 작은 몸으로 이정호의 다리를 끌어안고 목이 터져라 호소했다. “엄마는 우리를 싫어해! 우리를 버리려고 해! 전에 납치됐을 때도 구하러 오지 않았고, 나쁜 사람한테 그냥 죽이라고 했어!” “아빠, 엄마 내보내 줘! 엄마가 우리를 버리겠다면 우리도 엄마 필요 없어!” 제4화 애지중지 키운 아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자, 민윤희의 심장은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 아려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민윤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래, 그럼 네 아진 이모한테 가. 아진 이모가 실컷 사랑해 줄 테니까!” “민윤희!” 민윤희의 태도에 이정호는 끝내 격분했다. “너 때문에 우희가 죽을 뻔했는데 그런 말이 나와? 천식 발작이 오면 우희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이정호는 문밖에 서 있던 관리인을 향해 명령했다. “솜을 가져와.” 이정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챘을 때는 이미 경호원 몇 명이 민윤희를 바닥에 눌러 놓은 뒤였다. “입안에 솜을 밀어 넣어. 숨을 못 쉬는 게 어떤 기분인지 직접 느끼게 해.” “이정호... 읍!” 경호원은 민윤희의 어깨를 짓누른 채 솜뭉치를 한 줌씩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가느다란 솜털이 수많은 바늘처럼 기도로 파고들었다. 민윤희의 몸이 크게 휘었다. 가슴속에 불붙은 마른풀이 들어찬 것처럼 뜨겁고 답답했다. 거친 기침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흘렀고, 목에서는 고통스러운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민윤희는 바닥을 죽을힘을 다해 긁으며 이정호와 이재준을 올려다봤다. “아빠, 더 많이 넣어! 그래야 엄마가 다시는 못 그러지!” 이재준이 잔뜩 화난 목소리로 재촉했다. 이정호는 아들 옆에 서서,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소동을 구경하듯 무심하게 바라봤다. 남은 산소마저 바닥나자 민윤희는 바닥에 무겁게 쓰러졌고,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눈을 뜬 민윤희는 침대 곁에 앉아 있는 임아진을 보았다. 민윤희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임아진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윤희 씨, 내가 잘못했어요. 우희한테 봉제 인형을 너무 많이 사 줬어요.” “병원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그 장난감들 때문에 천식 발작이 온 거래요.” “정호한테는 이미 사과했어요. 윤희 씨도 나를 용서해 주면 안 돼요?” 민윤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침 이재준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진 이모 잘못 아니야. 엄마가 미리 말 안 해 줘서 그랬어!” 이재준은 임아진의 손을 잡아당겼다. “빨리 가자. 아빠 기다리다가 화나겠어.” 임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운 민윤희를 다시 바라봤다. “우희가 일 때문에 너무 놀랐더니 정호가 내가 자책할까 봐 목걸이를 사 준대요. 윤희 씨도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요. 가는 길에 사다 줄게요.” 민윤희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가슴에서 솟구치는 씁쓸함이 온몸을 집어삼킬 듯했다. 며칠 동안 아이의 담요를 빨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정호는 민윤희에게 그토록 잔혹한 벌을 내렸다. 임아진 때문에 자기 딸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이정호는 죄책감을 느낄 임아진을 위로할 생각부터 했다. 민윤희가 입을 열지 않자 임아진은 더 말하지 않고 재준의 손을 잡고 나갔다. 텅 빈 방을 바라보던 민윤희는 끝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두 손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목 놓아 울었다.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두 번의 삶에 걸쳐서 쌓인 설움을 이번에야말로 모조리 쏟아 내려는 듯했다. ... 민윤희는 사흘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나흘째 되던 날, A국 비자센터에서 체류 비자 발급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법원의 이혼 조정 결정이 확정되기까지 열흘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하루도 더 버티고 싶지 않았던 민윤희는 정확히 열흘 뒤에 A국으로 떠나는 항공권을 예약했다. 이정호가 두 아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왔을 때, 마침 민윤희의 핸드폰 화면에 전자 항공권이 떠 있었다. 이정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가려고?” “아무 데도 안 가. 그냥 본 거야.” 이정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담요 일은 내가 오해했어. 그래도 네가 우희 엄마라면 봉제 인형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어떻게든 아진이와 우희를 막았어야지. 네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 민윤희는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당신도 아이들 아빠잖아. 당신은 아무 책임도 없어?” 이정호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밖에서 일해. 너와는 달라. 전에 말했잖아. HT그룹 안주인으로서 네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아이 둘을 제대로 키우는 거라고.” 이정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조금 있다가 아이들을 놀이공원에 데려갈 거야. 너도 같이 가. 아이들한테 사과하는 셈 치고.” 민윤희가 거절하려 하자 재준이 손을 붙잡았다. “엄마, 이제 미워하지 않을게. 우리랑 같이 가자!” 우희도 매달렸다. “엄마도 같이 갔으면 좋겠어!” 두 아이의 진지한 눈을 마주하자 가슴이 저렸다. 민윤희는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어차피 곧 떠날 예정이었다. 오늘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인지도 몰랐다. 제5화 민윤희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차에 타고 나서야 임아진도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혼자서 아이 둘을 챙기기 힘들 것 같아서 아진이에게 도와 달라고 했어.” 이정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민윤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좌석에 앉았다. 가는 내내 조수석에 앉은 임아진은 간식을 집어 운전석에 앉은 이정호의 입가로 가져갔다. 두 아이도 앞좌석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대화에 끼어들며, 차 안에 민윤희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놀이공원에 도착하자 네 사람은 크고 작은 짐을 전부 민윤희에게 맡겼다. “엄마, 이것 좀 들고 있어!” “나는 아빠랑 아진 이모랑 회전목마 탈 거야!”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모정을 그리워해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윤희에게 맡긴 역할은 아이 돌보미였다. 세 사람이 회전목마 위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던 민윤희는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헛웃음만 나왔다.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저 네 식구 정말 행복해 보인다. 아빠도 잘생겼고 엄마도 예쁜데, 아이들까지 귀엽네.” “고용한 아이 돌보미도 꽤 예쁘지 않아?” ‘아이 돌보미’라는 말에 민윤희는 허탈하게 웃었다. 돌이켜 보면 민윤희의 삶은 정말 아이 돌보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이제 무시당하는 나날은 곧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 가지 놀이기구를 탄 뒤, 이재준과 이우희는 롤러코스터를 타겠다고 졸랐다. 민윤희는 생각할 틈도 없이 막았다. “너희는 천식이 있어서 그렇게 자극적인 놀이기구는 타면 안 돼.” 두 아이의 기분이 금세 상했다. “싫어! 우리도 탈 거야!” “나쁜 엄마는 또 방해해!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맨날 못 하게만 하잖아.” 이번에는 뜻밖에도 이정호가 민윤희의 편을 들었다. “엄마 말이 맞아. 아직 어린 너희가 타기에는 너무 위험해. 말 들어.” 이재준과 이우희는 눈을 맞추더니 입을 모았다. “그럼 아빠랑 아진 이모가 타. 우리는 엄마랑 오리 보러 갈게!” 임아진은 수줍은 눈으로 이정호를 바라보며 함께 타자고 권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이정호의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곧 민윤희에게 말했다. “아이들 좀 부탁해.” 말투는 공손할 만큼 건조하고 멀었다. 아내가 아니라 고용한 아이 돌보미에게 일을 맡기는 것 같았다. 이정호는 말을 마치고 임아진과 함께 멀어졌다. 민윤희는 두 아이를 데리고 호숫가로 갔다. 오리는 찾기도 전에 우희가 몰래 다리를 내밀어 민윤희의 발을 걸었다. 중심을 잃은 민윤희는 미처 몸을 바로잡지 못하고 ‘풍덩’ 소리와 함께 호수에 빠졌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휘감았다. 물을 들이마신 민윤희는 거칠게 기침하며 양팔을 마구 휘저었지만, 몸은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았다. “미운 엄마, 그냥 빠져 죽어!” 이재준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노려봤다. “엄마가 참견하지만 않았어도 아진 이모랑 롤러코스터 탈 수 있었잖아!” 이우희도 잔뜩 성난 표정이었다. 민윤희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목에서 끊어질 듯한 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재준아, 우희야...” 하지만 두 아이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엄마를 둑 위에 서서 지켜볼 뿐, 구하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민윤희의 마음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부서졌다. 과다 출혈의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어 두 아이를 낳았던 날이 떠올랐다. 열이 내려가지 않는 아이들 곁에서 밤을 새워 체온을 확인하고 몸을 닦아서 열을 떨어뜨리려고 무던히 애쓰던 날도 떠올랐다. 날마다 해가 뜨기도 전에 갖가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옷을 깨끗이 빨아 입히고, 책가방을 빈틈없이 챙기던 나날까지... 그 모든 사랑의 대가는 아이들의 지독한 미움이었다. ‘얼마나 처참하고 우스운 끝인가?’ 절망과 고통에 끌린 민윤희의 몸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끝없는 어둠에 잠겼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민윤희는 온몸이 젖은 채 물가에 누워 있었다. 이정호가 곁에 서 있었다. 민윤희는 더러운 물을 한 모금 토해 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이정호의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민윤희, 너 정말 정신이 나갔어?” “네가 아진이를 못마땅해하는 건 알아. 그래도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물에 뛰어들기까지 해서 아진이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거야?” “친엄마인 너보다 아진이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누구 잘못인지 생각해 본 적은 있어?” 차갑게 일그러진 이정호의 표정을 보자 민윤희는 해명할 힘조차 사라졌다. 이정호는 민윤희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 아이도 엄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줄 사람은 없었다. “당신 말이 맞아. 내 잘못이야.” 민윤희는 힘없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앉았다. 붉어진 눈으로 이정호를 바라봤다. “당신과 결혼하지 말아야 했고, 아이들을 낳지 말아야 했어. 진심을 다하면 진심이 돌아올 거라고 어리석게 믿은 것도 내 잘못이야.” “그게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야!” 이정호는 잠시 침묵했다. 표정이 전보다 더 사나워졌다. “HT그룹 안주인이라는 자리 말고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나는 처음부터 말했어. 이제야 알아들었다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민윤희는 쓰게 웃었다. ‘그래. 전생에는 너무 늦었지.’ 하지만 이번 삶은 아직 늦지 않았다. ‘이번에는 완전히 떠날 거야.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거라고.’ 제6화 5일 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가 열렸다. 이정호에게서 꼭 참석하라는 메시지를 받은 민윤희는 떠나기 전까지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집을 나섰다. 학교 강당은 학부모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민윤희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얼마 뒤 교장이 단상에 올라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이재준 학생과 이우희 학생의 어머님을 학부모 대표로 모시고 말씀을 듣겠습니다!” 민윤희는 당황했다. 왜 아무도 미리 알려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중, 임아진이 단상으로 걸어 올라가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이재준과 이우희가 엄마, 임아진입니다.” 그 뒤로 임아진이 무슨 말을 했는지 민윤희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두 아이가 꽃다발을 들고 깡충거리며 단상으로 올라가 임아진 곁에 섰다. 임아진의 양팔을 하나씩 끌어안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앞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야’라고 소개했다. 민윤희는 자신의 존재가 쓸데없이 덧붙은 조각처럼 느껴졌다. 학부모 총회가 끝나자 누구보다 빠르게 강당을 빠져나왔다. 한 교실 앞을 지날 때,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준아, 우희야. 선생님한테 사실대로 말해 보렴. 임아진 씨가 정말 너희 엄마니?” 담임 교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입학 때 제출한 가족관계 서류가 선생님한테 있어. 너희 어머니 이름은 분명 한...” “우리는 친엄마 싫어요! 더는 우리 엄마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이재준이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아진 이모는 우리를 간섭하지 않아요. 아빠도 아진 이모를 좋아해요. 어차피 곧 우리 엄마가 될 거예요!” 이우희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아빠는 아진 이모랑 금방 결혼할 거예요!” 민윤희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가슴의 통증은 어느새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몸을 돌려 교문으로 향했다. 학교를 나서자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민윤희는 비가 잦아들 때까지 처마 아래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앞에 멈춰 섰다. 차창이 내려가며 임아진의 얼굴이 드러났다. “윤희 씨, 우리랑 같이 가요. 이런 날씨에는 차 잡기 힘들어요.” 민윤희는 택시 호출 앱에 ‘주변에 호출 가능한 택시가 없습니다’라는 안내가 뜬 화면을 내려다본 뒤 조수석 문을 열고 탔다. 두 아이는 민윤희를 보자마자 웃음을 거뒀다. 민윤희의 등장으로 좋은 기분을 전부 망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윤희 씨, 오늘은 미안해요. 재준이랑 우희가 민윤희 씨는 너무 바빠서 올 수 없다고 해서 대신 간 거예요. 나한테 화내지는 않을 거죠?” 임아진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세우며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드렸다. 민윤희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화낼 이유 없어요.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니까.” “엄마, 어디 가?” 뒷좌석의 이재준이 작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나랑 우희 빨래가 아직 엄청 많이 남았어!” 이우희도 입술을 내밀었다. “맞아, 엄마. 갔다가 빨리 돌아와야 해. 안 그러면 집이 엉망이라서 우리랑 아진 이모가 편하게 놀 수 없잖아!” 민윤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앞으로는 그런 일을 해 줄 생각이 없다고 말하려던 때, 임아진이 비명을 질렀다. “악!” 폭우가 시야를 흐려 놓았다. 임아진은 옆에서 다가오는 차를 보지 못했다. 놀라서 운전대를 세게 꺾는 바람에 차는 교량 난간을 들이받았다. 민윤희의 몸이 거세게 앞으로 쏠렸다. 이마가 앞 유리에 세게 부딪히며 의식이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차는 금방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시야는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들었고, 귀에는 구조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가 다리에 걸려 있어서 곧 추락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먼저 꺼내면 반대쪽이 균형을 잃을 위험이 큽니다.” “아빠, 아진 이모부터 구해 줘! 아진 이모는 아픈 거 제일 무서워해!” “아빠, 엄마는 두고 가! 엄마도 우리가 죽든 말든 신경 안 썼잖아. 우리도 엄마 안 구할 거야!” 두 아이가 악을 쓰는 소리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민윤희의 심장에 박혔다. 뒤이어 이정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임아진 씨부터 구해주세요.” “임아진 씨가 더 크게 다친 분입니까?” “아닙니다.” 이정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옆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곧 구조대원들이 달려들어 임아진을 차 밖으로 끌어냈다. 한쪽 무게가 사라진 차는 곧바로 중심을 잃고 민윤희를 태운 채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제7화 병원에서 깨어난 민윤희는 온몸이 트럭에 짓밟힌 듯 아팠다. 갈비뼈 부근에서는 정으로 쪼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배에도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다. 낯선 통증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깨어났어?” 이정호가 곁에 서서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한동안 침묵하던 이정호가 입을 열었다. “아진이는 이틀 뒤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해. 핵심 책임자라 빠질 수가 없어.” 민윤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생기가 없었다. 이제 지겨운 핑계로 둘러댈 필요가 없다고 이정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민윤희는 이미 한평생을 바친 결과로 이정호의 차디찬 마음을 꿰뚫어 봤으니까. “참.” 이정호는 잠깐 말을 멈췄다. “아진이는 원래 신장이 좋지 않았는데, 이번 사고로 상태가 더 나빠졌어. 그래서... 병원에 압력을 넣어 동의 절차를 대신 밟게 하고, 네 신장 하나를 아진이에게 이식시켰어.” 그 말을 듣고서야 민윤희의 눈에 반응이 돌아왔다. 민윤희는 고개를 들어 이정호를 바라봤다. 눈에는 충격과 고통, 먹물처럼 짙어 풀어지지 않는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사고는 임아진의 전적인 잘못이었다. 그런데 대가로 신장 하나를 잃은 사람은 민윤희이었다. ‘임아진을 향한 이정호의 사랑은 옳고 그름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맹목적이었던 건가?’ 민윤희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전생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어 웃음이 났다. ‘이 무정한 남자에게 내 가장 빛나는 시절을 통째로 묻어 버렸다니...’ 이정호는 민윤희의 웃음이 이상하리만큼 거슬렸다. 차가운 목소리가 병실에 내려앉았다. “치료 잘 받고 빨리 퇴원해. 이 집에는 네가 필요하고, 아이들에게도 네가 필요해.” 민윤희는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는 바싹 마르고 쉬어 있었다. “하지만 이정호...” ‘난 이제 당신이 필요 없어.’ 마지막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 젊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보호자님, 임아진 씨가 수술 부위가 아프다고 합니다.” 이정호는 듣자마자 몸을 돌려 나갔다. 민윤희에게 남긴 것은 차갑고 단호한 뒷모습뿐이었다. ... 그날 이후 이정호는 민윤희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정호에 관한 이야기는 이따금 민윤희의 귀에 흘러들었다. “이정호 대표님은 임아진 씨한테 정말 잘해 주시더라. 매일 아이 둘을 데리고 문병 오고, 업무도 병실에서 본대!” “몰랐어? 임아진 씨는 이정호 대표님의 첫사랑이야. 두 사람이 대학 다닐 때 소문난 커플이었대. 떨어져 지내던 때는 저녁 한 끼 같이 먹으려고 매일 비행기를 네 시간이나 탔다더라.” “그렇다면 이해되네. 첫사랑이 저렇게 버티고 있으니 정작 본처인 민윤희 씨는 값싼 대용품일 수밖에 없지.” “...” 그런 말을 들어도 이미 만신창이가 된 민윤희의 마음에는 작은 파문 하나 일지 않았다. 이혼 조정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마지막 날, 민윤희는 예정보다 일찍 퇴원했다. 가정법원에서 확정증명원을 발급받은 뒤 구청에 이혼 신고를 마쳤다. 이혼 사실이 기재된 혼인관계증명서를 받아 든 민윤희의 마음에는 예상했던 통증 대신 텅 빈 듯한 무감각만 남았다. 민윤희는 이혼신고 수리증명서와 혼인관계증명서 사본을 등기우편으로 집에 보낸 뒤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민윤희는 이정호와 연결된 연락처를 모조리 지웠다. 마음 밑바닥에 쌓여 있던 고통이 바람에 흩어지는 듯했고, 숨도 전보다 가벼워졌다. 전생에서 이정호는 ‘마치 유령처럼 존재감 없는 남편’이었다. 민윤희가 기뻐하고 슬퍼하던 모든 자리에 없었다. ‘이번 삶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이정호의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차례야.’ ... 며칠이 지나서야 이정호는 담당 의사에게 민윤희가 이미 퇴원했다는 말을 들었다. 임아진에게 신장을 내주게 한 일이 마음에 걸렸던 이정호는 목걸이 하나를 사서 민윤희의 상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자 두 아이는 외투를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신이 나서 위층으로 뛰어갔다. “엄마, 구운 쿠키랑 케이크 먹고 싶어!” “케이크는 초콜릿 맛으로 해 줘!” 하지만 아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적막뿐이었다. 이정호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곁에 있던 집사에게 물었다. “민윤희는?” 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등기우편 봉투를 내밀었다. “사모님은 며칠째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댁으로 이걸 보내셨는데, 수취인이 대표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봉투를 받아 든 이정호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집사가 말을 이었다. “사흘 전, 대표님과 사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으니, 아마 미리 준비해 두신 선물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정호의 팽팽하던 눈썹이 조금 누그러졌다. 마음에 걸리던 의문도 함께 가라앉았다. ‘그 사람은 화가 나도 지켜야 할 선은 아는 여자야.’ ‘억울한 일을 겪고도 결혼기념일 선물을 잊지 않고 나를 준비했잖아.’ 이정호는 집사가 건넨 가위를 받아 길쭉한 손가락으로 봉투를 천천히 뜯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