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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에 흩어진 약속
연정헌과 나는 어린 나이에 부부가 되어 반평생을 함께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 온 나라가 애도했다. 황제는 특별히 덕안후의 작위를 추서했다. 나는 그의 한평생이 아쉬움 없이 다 채워졌으리라 생각했다. 유품을 정리하던 날, 모서리가 말리도록 읽은 원고 한 뭉치를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낡은 나무 상자도 함께 굴러떨어져 편지 여러 통이 흩어졌다. 몸을 굽혀 주우려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적힌 글을 보았다. 모두 같은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였다.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얼음 구덩이에 빠진 듯 그 자리에 굳었다. 내가 열일곱이던 해, 연정헌은 칙명을 받고 남녘으로 수해를 다스리러 갔다가 한 여인을 데려왔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으려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질투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고 소란을 피웠다. 목숨을 걸고 매달린 끝에 그 여인을 돌려보내게 했다. 그 뒤 연정헌은 눈시울을 붉힌 채 나를 놓칠세라 끌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제발 나를 겁주지 마시오. 내게는 당신뿐이오. 남은 평생 당신만 있으면 되오. 내 말을 믿어 주겠소?" 그 뒤로 그의 곁에 다른 여인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종이에 적힌 뜨거운 사랑의 맹세를 보고 있자니 끝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가 류지란을 저택에 데려왔던 날로 돌아와 있었다.
Chapters (1)
第1章
연정헌과 나는 어린 나이에 부부가 되어 반평생을 함께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 온 나라가 애도했다. 황제는 특별히 덕안후의 작위를 추서했다. 나는 그의 한평생이 아쉬움 없이 다 채워졌으리라 생각했다.
유품을 정리하던 날, 모서리가 말리도록 읽은 원고 한 뭉치를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낡은 나무 상자도 함께 굴러떨어져 편지 여러 통이 흩어졌다.
몸을 굽혀 주우려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적힌 글을 보았다. 모두 같은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였다.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얼음 구덩이에 빠진 듯 그 자리에 굳었다.
내가 열일곱이던 해, 연정헌은 칙명을 받고 남녘으로 수해를 다스리러 갔다가 한 여인을 데려왔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으려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질투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고 소란을 피웠다. 목숨을 걸고 매달린 끝에 그 여인을 돌려보내게 했다.
그 뒤 연정헌은 눈시울을 붉힌 채 나를 놓칠세라 끌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제발 나를 겁주지 마시오. 내게는 당신뿐이오. 남은 평생 당신만 있으면 되오. 내 말을 믿어 주겠소?"
그 뒤로 그의 곁에 다른 여인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종이에 적힌 뜨거운 사랑의 맹세를 보고 있자니 끝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가 류지란을 저택에 데려왔던 날로 돌아와 있었다.
제1화
회랑에 바람이 일었다.
아직 앳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남녘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류지란이 어떻게 보살펴 주었는지, 연정헌은 그 일들을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전생에는 그 눈에 어린 다정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기대가 가득한 그 눈을 마주하자, 좀처럼 꺾이지 않던 오기가 문득 사그라들었다.
나는 겨우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아씨는 심성이 참 고우니,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십시오."
...
잠시 뜰 안이 고요해졌다.
연정헌은 웃음을 거두고 내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한참 뒤, 품에서 불쑥 백옥 비녀를 꺼냈다.
어릴 적 봉록을 모아 내게 만들어 준 사랑의 징표였다.
"부인, 그 여인을 아내로 맞으려는 게 아니오. 잊었소? 한 사람만 사랑하며 평생 함께하겠다고 했잖소."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눈을 내리깔고 희미하게 웃었다.
가슴에 맺힌 쓰라림이 온몸으로 퍼졌다.
지난 생에 목숨으로 협박해 류지란을 쫓아낸 뒤, 연정헌은 달라졌다.
말수가 부쩍 줄었다.
낮에는 정무에 매달리고 밤에는 서재에 틀어박혔다.
툭하면 이런저런 핑계로 먼 곳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까닭을 물으면 나랏일이 바쁘다는 대답뿐이었다.
연회에 나설 때면 명문가의 부인들이 부군께서 나라를 위해 그토록 애쓰시니 앞날이 창창하시겠다며 내게 축하를 건넸다.
그때는 어리석었다.
정말로 집안과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 치하 뒤에 숨은 동정과 안타까움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두툼한 편지 뭉치를 끝까지 읽고, 류지란과 수년 동안 끊임없이 마음을 주고받았다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한 사람만 사랑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타협하고 체념했을 뿐이었다.
가슴 깊이 품은 사람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
울고불고 목숨까지 걸고 떼를 쓰는 사이, 나만을 향하던 마음은 이미 닳아 없어져 있었다.
고집스러운 나를 이기지도, 어린 시절 맺은 부부의 정을 버리지도 못했기에 류지란을 향한 마음을 억누른 채 내 곁에 남았던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눈을 내리깐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비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연정헌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예전에 내가 말을 잃을 때는 늘 서러움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그럴 때면 연정헌은 차분히 달래며 다정하게 입을 맞추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연정헌이 몸을 숙여 조심스레 물었다.
"부인, 마음이 상했소? 싫다면 당장 돌려보내리다. 내 곁에는 언제나 당신뿐이오."
아직 앳된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전생의 나였다면 벌써 그 품에 안겼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살아 돌아온 나는 눈앞의 다정한 얼굴을 바라보아도 그저 지치기만 했다.
"마음이 상한 게 아닙니다. 그 아씨가 참 괜찮은 사람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곁에 있어 준다면 저도 한결 마음이 놓일 겁니다."
연정헌이 멈칫했다.
"부인, 진심이오?"
마음 한구석이 휑했다.
그 눈을 마주하자, 전생에 어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리께서는 근심이 지나쳐 마음의 병을 얻으셨습니다. 약으로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고작 서른에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에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부군, 혼인한 지 두 해가 넘었는데도 아직 자식이 없으니, 참으로 큰 불효입니다."
"훗날 부군 곁에 자식도 없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말을 듣고 난 연정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놀라움과 안쓰러움, 그 사이로 희미한 반가움도 스쳤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내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내가 첫마디를 꺼냈을 때부터 류지란은 털썩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말을 다 듣고 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틋한 눈길로 연정헌을 올려다보았다.
더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핑계를 대고 몸을 돌렸다.
회랑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뒤에서 두 사람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드디어 나리께 시집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겨우 내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열 살에 도성으로 왔다.
또래 중 아는 사람이라곤 연정헌뿐이었다.
명문가 여인들의 예법을 전혀 몰라 연회에서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그때마다 연정헌이 나서서 나를 감싸 주었다.
내가 성년을 맞던 해, 가을 사냥에서 연정헌이 으뜸을 차지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연정헌은 문무백관과 명문가 여인들 앞에서 깊이 절을 올렸다.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나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했다.
그날 처음으로 수줍음도 잊은 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품에 뛰어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웃었던 기억이 난다.
황제는 호쾌하게 손을 내저으며 우리의 혼인을 명하는 칙서를 내렸다.
코끝이 시큰해져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곁을 지키는 시녀를 불렀다.
"채령아, 내 문서를 가지고 관아에 가거라. 여러 해 자식이 없어 부인 구실을 다하지 못했으니, 스스로 이혼을 청한다고 전해."
제2화
채령은 멍하니 나를 보더니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마님?"
나는 눈을 감았다.
"어서 가."
그날 밤, 잠자리에 들 채비를 마쳤을 때였다.
연정헌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애써 감추려 해도 얼굴에 어린 들뜬 기색은 내 눈을 피하지 못했다.
"오늘 밤은 그 아씨와 함께 계시지 않고 어쩐 일이십니까?"
"아직 정식으로 맞아들인 게 아니지 않소."
나는 짧게 대꾸하고는 몸을 돌려 누웠다.
"내일 집사에게 일러 우선 첩을 들이는 예에 맞춰 준비하게 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침상 곁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연정헌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옆에 누웠다.
팔이 내 허리 위에 얹혔다.
"부인."
몸이 굳었다.
어둠 속이라 서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고맙소."
"예."
얼마 지나지 않아 관아에서 이혼 문서가 왔다.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 몇 장이 떨어졌다. 벌써 가을 기운이 도는 듯했다.
집사가 장부를 건넸다.
혼례 잔치에 쓸 물품이 적혀 있었다.
채령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마님, 어찌 굳이 그 아씨를 나리 곁에 두려 하십니까?"
"나리께서 마님을 그리 아끼시는데, 반대하셨다면 그 아씨도 이 집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장부를 내려놓으며 한숨처럼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은 이미 내게서 떠났는데, 사람만 억지로 붙잡아 두면 무슨 소용이겠어?"
첩을 들이는 데 이토록 번거로운 예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류지란은 달랐다.
오후 내내 장부를 들여다보고서야 쓸 물품을 겨우 정했다.
막 찻잔을 들었을 때 하인이 소식을 전했다.
"마님, 나리께서 폐하를 모시고 나가셨다가 습격을 당하셨습니다."
너무 급하게 벌떡 일어선 탓에 갓 우린 차가 담긴 주전자가 그만 넘어졌다.
뜨거운 찻물이 온몸에 쏟아졌다.
특히 두 다리가 불에 덴 듯 쓰라렸다.
채령이 의원을 부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쳐 내고, 아픔을 무릅쓰고 대문으로 달렸다.
마침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왔다.
오후 내내 내릴 듯 말 듯하던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채령이 우산을 들고 뒤따라오며 천천히 가시라고 일렀다.
치맛자락을 걷어 쥐고 물웅덩이를 밟아 가며 회랑과 정자를 돌아 나갔다.
멀리 대문 쪽에서 사람들이 연정헌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저려 한 걸음 다가가려는 순간, 누군가 내 옆을 스쳐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대로 연정헌 곁에 몸을 숙여 엎드렸다.
빗방울이 후두둑 땅을 두드렸다.
류지란은 연정헌의 얼굴을 감싸 쥐고 하염없이 울었다.
"변을 당하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십니까?"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제 목숨을 내주어서라도 나리만은 무사하시길 바랐습니다."
"나리, 남녘에 있을 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곁에는 나리뿐입니다.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저 혼자 어찌 살란 말입니까?"
연정헌도 눈시울을 붉히며 힘겹게 그 손을 잡았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울지 마. 앞으로는 더 조심하마..."
내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다정함이었다.
한창 서로를 사랑할 때조차 저토록 살뜰하게 달래 준 적은 없었다.
흠뻑 젖은 옷에서 올라온 한기가 뼛속까지 조금씩 스며들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사람처럼 내딛으려던 발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가을비는 가늘고 오래 내린다지만, 오늘 밤의 비는 한여름에 천둥과 함께 쏟아지는 폭우 같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소리에 마음까지 술렁거렸다.
비를 맞은 탓에 밤이 되자 열이 펄펄 끓었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지난 생이 떠올랐다.
남녘의 수해를 다스리러 간 연정헌과 도중에 연락이 끊겼었다.
젊은 나이에 이름을 떨쳤고 황제의 신임도 두터웠던 터라, 조정에서는 이미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소식이 끊긴 동안 도성에 홀로 남아 온 집안을 지켰다.
하루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때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넓은 도성에서 나 혼자 어떻게 살아가지?'
그런데 훗날 발견한 편지에서 연정헌은 오늘 있었던 일을 회상하면서도 류지란을 쫓아내 생명의 은혜를 갚지 못하게 했다며 나를 원망하기만 했다.
내가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는지, 밤낮으로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는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류지란을 집에 데려온 순간, 우리 인연은 이미 끝나 있었다.
십여 년을 함께 버틴 것도, 결국 나 혼자 미련을 놓지 못해서였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는 그를 놓아주리라.
나 자신도 놓아주리라.
마침 변방의 집에서 편지가 왔다.
막내 동생 심승규가 사랑하는 여인과 혼인을 약속했다는 소식이었다.
머지않아 혼례를 올릴 예정이었다.
나는 앞서 집에 편지를 보내 한번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었다.
이제 그 답장이 온 것이다.
아버지의 힘 있는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단희야, 닷새 뒤에 사람을 보내 데려오마."
제3화
이튿날 아침, 의원이 연정헌의 상처가 어떤지 알려 주었다.
"나리께서는 본래 기골이 장대하십니다. 어제 기력이 빠지셨던 건 그자들이 검에 몸의 힘을 빼는 약을 발라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큰 탈은 없으니 며칠만 더 쉬시면 곧 기운을 차리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례를 했다.
그런데 돌아가려던 의원이 내 안색을 보고는 몸을 잘 돌보시라는 말을 덧붙였다.
채령은 여전히 나를 대신해 분을 삭이지 못했다.
"남도 마님의 안색이 이리 나쁜 걸 알아보는데, 나리께서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괜찮으신지 한마디도 안 물으셨지 않습니까?"
"새로 온 그 요사스러운 여자에게 단단히 홀리신 게 틀림없습니다."
"전에는 분명..."
"채령아, 말조심해라."
내 말이 떨어지자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지란, 부인께 문안드립니다.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나서야 인사를 올리니, 부디 꾸짖어 주십시오."
뜰에서 몸을 낮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지난 생에는 잠깐 보았을 뿐이라, 수수한 얼굴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지금 보니 뺨에는 혈색이 돌고, 눈길을 돌릴 때마다 생기가 넘쳤다.
전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예는 그만 올려도 되니 일어나라고 했다.
채령에게는 화장함에서 백옥 팔찌 한 쌍을 꺼내 오라 일렀다.
첫인사로 주는 선물이었다.
그러고는 자리를 떠나려는데 류지란이 불쑥 나를 불렀다.
"부인, 잠시 둘이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붕이 있는 다리 앞에 나란히 섰다.
"남녘에서 석 달 동안 나리를 돌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목숨을 구해 드린 보답을 돈으로 하려 하셨습니다."
류지란은 고개를 돌려 내 낯빛을 살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뒤에 습격을 받았을 때는 제가 대신 막아섰습니다."
"그날 밤 내내 제 곁을 지키시더니, 다음 날 저를 댁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말이 끊겼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여기서 좀 더 지낸 뒤에, 정실과 동등한 지위의 아내로 맞으라 하겠소."
그때 류지란이 불쑥 말했다.
"참 냉정하십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붉어진 눈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어찌 그리 너그러운 척하십니까? 밖에서 몇 번이나 목숨을 걸며 고생하신 분이 돌아와서도 부인 눈치를 살피셔야 합니까?"
"사내가 첩을 두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저는 목숨을 구해 드렸습니다. 부인 자리를 빼앗으려던 게 아닙니다. 그저 곁에서 모시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째서 그분에게 자꾸 서운한 기색을 보이십니까? 어제 다치셨는데도 한 번을 들여다보지 않으셨습니다."
"어젯밤 아픈 몸으로 문밖만 애타게 바라보며 부인이 오시기를 기다리셨던 건 아십니까? 그런데 부인은 사람을 보내 안부 한마디 물으시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부인의 마음을 상하게 했나 보다 하시며 자책하셨습니다."
"부인, 정 마음을 푸실 수 없다면 저는 남녘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분 마음도 헤아려 주십시오."
말끝마다 간절함이 묻어났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무릎 꿇은 여인을 내려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지금 이대로도 좋지 않소?"
"내게서 받은 서운함을 그대 곁에서 달랠 수 있으니, 머잖아 마음도 온전히 그대에게 가겠구려."
류지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눈에 분노가 어렸다.
"어찌 저를 그리 여기십니까? 총애를 다투려는 게 아닙니다. 그분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어째서 이토록 냉정하십니까?"
"부인은..."
"지란아!"
다가오던 연정헌은 류지란이 무릎 꿇은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성큼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야?"
류지란은 고개를 저으며 살짝 웃었다.
"부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연정헌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의심 어린 시선이 내 얼굴을 훑었다.
"부인, 불만이 있으면 내게 따지시오."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기침이 잇달아 치밀었다.
참아 보았지만, 폐 안에서 치미는 열기에 온몸이 타는 듯 아팠다.
결국 먼저 버티지 못한 쪽은 나였다.
"청첩장과 잔칫상은 모두 마련해 두었으니, 한 번 더 살펴보십시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연정헌이 성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인!"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제4화
저택이 분주해졌다.
며칠 뒤 치를 혼례 준비에 모두가 바빴다.
그러던 중, 초대장이 도착했다.
가깝게 지내는 부인의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을 기념하는 잔치였다.
거절하기 어려워 가겠다고 답했다.
이튿날 아침, 축하 선물을 챙겨 정나경의 저택으로 갔다.
벗인 정나경은 나를 보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안색이 어쩌다 이리 나빠졌어?"
나는 옅게 웃었다.
"며칠 전 감기에 걸렸는데, 이제는 다 나았어."
정나경은 믿지 않았다.
나처럼 변방에서 자랐고, 성미는 나보다도 조금 더 불같았다.
"남녘에서 여인을 데려와 첩으로 들인다면서? 걱정 마. 네 대신 이 분은 꼭 풀어 줄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마, 마님. 큰일 났습니다."
"사냥개가 갑자기 날뛰더니 묶어 둔 데서 빠져나가 달아났습니다."
정나경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
"겁만 좀 주라고 했다. 어쩌다 놓친 것이냐?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데려와라!"
정나경은 변방에 있을 때부터 사냥개 기르기를 무척 좋아했다.
개들은 순했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면 다 큰 사람만큼 키가 컸다.
류지란처럼 가냘픈 여인이 그런 개와 마주치면 어찌 될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정나경은 겁에 질려 창백해졌다.
"단희야, 원래 순한 녀석이야. 조금 겁만 주려던 건데, 멀쩡하던 개가 어쩌다 갑자기 날뛰었을까?"
나는 정나경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나 역시 안심할 수 없었다.
그저 놀란 것만으로 끝나기를 바랐다.
그때 문간이 소란스러워졌다.
창을 든 관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흥겹던 잔칫자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앞장선 이가 체포 명령서를 꺼내더니 내가 개를 풀어 사람을 다치게 했다고 했다.
폐하의 명으로 나를 잡아 관아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정나경이 나서서 해명하려 하자 곧장 막았다.
오늘은 정나경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잔치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걱정 마. 별일 아니야. 금방 다녀올게."
그렇게 달래고 치맛자락을 들어 마차에 오르려는데 곁에 있던 병사가 형구를 꺼내 내게 채우겠다는 시늉을 했다.
"마님이 누구신지 알고 이리 모욕하십니까? 목숨이 아깝지도 않습니까?"
채령이 분을 참지 못하고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눈을 들어 병사들을 살폈다.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한참 뒤, 나는 채령을 밀어내고 손을 내밀어 형구를 채우게 했다.
"마님?"
채령은 눈시울이 새빨개지도록 울었다.
"집으로 돌아가."
"예, 나리를 찾아뵙겠습니다. 분명 마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겁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채령은 달려갔다.
비틀거리는 뒷모습을 보며 지은 웃음은 우는 것만 못했다.
채령은 연정헌을 찾아가 보아야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몰랐다.
저들 중 몇몇은 연정헌의 곁에서 본 얼굴이었다.
이번 일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어찌 폐하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연정헌을 문병하러 온 황제는 마침 사냥개가 류지란을 물려고 뒤쫓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위급한 순간 연정헌이 화살 한 발로 개를 쏘아 죽여 큰 화는 겨우 면했다고 했다.
그러나 어진 성품의 황제는 권세를 믿고 남을 괴롭히는 일을 두고 보지 못했다.
크게 노해 철저히 조사하라 명했다.
정나경의 집 하인들은 사실대로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내가 제 주인의 선의를 이용했다고만 했다.
나는 감옥에 갇혔다.
감옥은 어둡고 답답했다. 사방 벽에서 축축한 냉기가 배어 나왔다.
두려움과 막막함이 나를 옥죄었다.
그러다 끼익, 누군가 감방 문을 밀어 열었다.
제5화
검은 관복을 차려입은 연정헌은 훤칠했다.
일렁이는 촛불 아래, 늘 온화하던 얼굴은 속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무심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도성에 처음 왔던 무렵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를 못마땅해하던 명문가 여인들이 연회에서 물건을 훔쳤다며 누명을 씌웠다.
몰아붙이는 기세에 하마터면 옷까지 벗겨질 뻔했다.
자리를 가득 메운 권세가들은 냉담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칼을 들고 내 곁을 지켜 준 사람이 연정헌이었다. 여러 명문가의 미움을 사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사람을 보내 나를 감옥에 가두었다.
목이 메어 왔지만 얼굴에는 냉기만 남았다.
"부군께서도 제가 한 짓이라 여기십니까?"
연정헌의 고요한 눈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부인, 폐하께서 보내신 이들이 당신의 옥패를 찾아냈소. 오래전에 나경에게 준 물건인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나경이 이 큰일을 벌인 건 결국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오? 폐하께서도 노하셨으니, 나로서는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야 하오."
"걱정은 마시오. 이곳에는 다 일러두었으니, 아무도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요."
"불편하더라도 며칠만 여기 계시오. 일이 잠잠해지면 내가 집으로 데려가리다."
목소리는 차갑고도 서먹했다.
마치 내게 대단한 은혜라도 베푸는 듯했다.
그 무심한 눈에서 어떤 감정이라도 찾으려 빤히 바라보았지만, 제 처사가 당연하다는 태도뿐이었다.
남아 있던 마지막 정도 그 순간 끊어졌다.
떠나기 전, 연정헌은 또다시 나를 가르치려 드는 말투로 말했다.
"부인, 억울한 건 아오. 하지만 지란은 더더욱 아무 죄가 없소. 나름대로 따져 보고 당신에게 가장 가벼운 벌을 내린 거요."
"그만 심통 부리시오. 며칠 뒤에 데리러 오리다."
그 뒤로 연정헌이 무슨 말을 더 했는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가슴이 꽉 막힌 듯하고 코끝만 시큰거렸다.
감방 문이 다시 닫히자,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웃으려 했지만, 웃음을 짓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한밤중에 감방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옥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내 손목을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누구십니까? 아직 심리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힘껏 버둥거리자, 짝 소리와 함께 뺨을 맞았다.
"감옥에 들어와서도 위세를 부리겠다고? 좋게 말할 때 들을 것이지, 꼭 매를 벌어야겠느냐?"
"여봐라, 묶어라. 내가 직접 심문하겠다."
험상궂은 관리가 내 얼굴을 움켜쥐었다.
이내 나는 포박당했다.
"법을 어기고 고문을 하다니, 나리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이제 와서는 그 이름을 내세워 저들이 조금이라도 자제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자 옥졸들은 되레 웃음을 터뜨렸다.
"나리께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신다고? 하하하. 이 한밤중에 심문하라는 명을 누가 내리셨는지 아느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론 나리께서 내리셨다."
그 말에 주위가 일순 조용해졌다. 입을 벌렸지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부인, 죄를 인정하면 매를 맞을 일도 없다. 끝까지 버틴다면, 그 고운 살결로 몇 번이나 견딜 수 있겠느냐?"
자백서가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나는 그들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나리를 뵙게 해 주십시오."
분명 다 일러두었으니 다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었다.
"나리께서는 곧 경사를 치르실 몸이다. 널 만날 틈이 어디 있겠느냐?"
말을 마친 옥졸이 옆에 있던 가죽 채찍을 낚아챘다.
휘익,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얼마나 지났을까. 몸이 더는 내 것 같지 않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 쉬는 것조차 아팠다.
꼬박 이틀 동안 온갖 고문을 당했다.
고문을 가하는 관리들도 몇 차례나 바뀌었다.
나는 짚더미에 누워 어둠 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날의 일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그날 밤, 누군가 귓가에서 우는 듯했다.
힘겹게 눈을 뜨니 정나경이 있었다. 울어서 두 눈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개자식들, 다 개자식들이야. 어떻게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달래 주려고 겨우 한 음절을 내뱉자, 목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정나경은 새하얗게 질린 채 나를 끌어안고 온몸을 떨었다.
"단희야, 제발 이러지 마. 조금만 더 버텨. 부탁이야, 조금만 더... 네 아버지께서 오셨어. 바로 문밖에 계셔. 오늘 밤 너를 여기서 내보낼 거야."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익숙한 이들이 다급하게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였다.
더는 의식을 붙잡을 수 없었다. 끝없는 어둠에 잠기기 전,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남았다.
'정헌,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
...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연씨 저택이 떠들썩해졌다.
붉은 비단을 높이 내건 모습은 남들이 정실을 맞는 혼례보다도 성대했다.
"역시 폐하의 총애를 받는 분은 다르구려. 고작 첩을 들이는데 이만한 잔치를 벌이다니."
"예전에 정실을 맞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요."
구경꾼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정나경은 붉어진 눈으로, 말 위에 앉아 기쁜 기색이 역력한 연정헌을 노려보았다.
손을 한 번 내젓자 망자에게 바치는 흰 종이돈이 눈처럼 흩날렸다.
"자, 다들 더 크게 불어라!"
"관을 들어라. 연씨 저택에 축하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