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봄을 빼앗은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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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녀인 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동궁에 들어가 태자의 첩이 되었다. 동궁에서 보낸 육 년 동안 조정겸은 나를 다정하게 대했고, 어린 황손은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언니를 닮은 유정월이 나타나 제 입으로 언니의 환생이라 하기 전까지는.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황손은 그녀를 살갑게 어마마마라 부르면서, 나를 남의 자리를 차지한 가짜라고 욕했다. 유정월이 내 뱃속 아이가 황손의 자리를 위협할까 두렵다고 하자, 조정겸은 그 한마디에 임신한 내게 낙태약을 들이부었다. "나원아, 너는 사생아에 불과하다. 동궁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네 몫이 아닌 것까지 탐내지 마라." 사흘 동안 죽을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침상이 피로 물들고, 이미 사람의 형체를 갖춘 딸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망가진 몸을 이끌고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육 년이 지났습니다. 황후 마마, 이제 저와 어머니를 놓아주십시오."

Chapters (1)

第1章

적녀인 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동궁에 들어가 태자의 첩이 되었다. 동궁에서 보낸 육 년 동안 조정겸은 나를 다정하게 대했고, 어린 황손은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언니를 닮은 유정월이 나타나 제 입으로 언니의 환생이라 하기 전까지는.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황손은 그녀를 살갑게 어마마마라 부르면서, 나를 남의 자리를 차지한 가짜라고 욕했다. 유정월이 내 뱃속 아이가 황손의 자리를 위협할까 두렵다고 하자, 조정겸은 그 한마디에 임신한 내게 낙태약을 들이부었다. "나원아, 너는 사생아에 불과하다. 동궁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네 몫이 아닌 것까지 탐내지 마라." 사흘 동안 죽을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침상이 피로 물들고, 이미 사람의 형체를 갖춘 딸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망가진 몸을 이끌고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육 년이 지났습니다. 황후 마마, 이제 저와 어머니를 놓아주십시오." 제1화 전각 구석의 청동 물시계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내 몸 아래로도 피가 그치지 않고 흘러 속바지를 붉게 적셨다. 황후는 눈시울을 붉히며 서둘러 궁녀들에게 나를 침상에 눕히라 일렀다. "정겸이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내가 잘 안다. 지금은 잠시 눈이 멀어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게야." "더구나 윤헌을 두고 갈 수 있겠느냐? 너를 친어미로 여기는 아이인데." 나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침상 가장자리에 엎드렸다. "소첩은 복이 없어 태자 전하를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황손의 어미 자리도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황후 마마, 공은 없어도 지난 육 년간 애쓴 정을 보아 주십시오. 죽기 전 마지막 소원만은 들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육 년 전, 막 열다섯이 된 나는 이듬해 봄을 기다렸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던 노씨 집안의 젊은 장군에게 시집갈 날이었다. 그때 자신이 내 아버지라는 남자 장경문이 불쑥 나타났다. 내 이름을 장나원으로 바꾸더니, 도성으로 돌아가 가문의 딸로 살게 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도성에 도착하자 황후와 아버지는 어머니의 목숨을 빌미로 나를 협박했다. 나는 떠밀리듯 동궁에 들어가 봉의(奉儀: 태자의 하급 후궁)가 되었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적녀였던 언니가 남긴 어린 황손을 돌보라는 것이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실상은 황후와 아버지가 장씨 가문의 오랜 부귀를 지키려는 수작이었다. 내가 원하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을 다루는 의원에게 배운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 독을 먹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목숨을 건졌다. 결국 황후는 나와 육 년의 기한을 약속했다. 육 년 뒤, 황손이 자라면 자유롭게 놓아주겠다고. 어머니를 살리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동궁에 들어간 지 삼 년째 되던 해, 진안왕이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조정겸을 살리려 그를 향한 칼날을 대신 맞았다. 그 뒤로 겨울만 되면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조윤헌을 위해서는 한 걸음마다 무릎을 꿇으며 삼천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호은사에서 호신부를 받아 왔다. 아이의 몸을 보하려 온갖 약초를 직접 맛보기도 했다. 동궁에서 보낸 육 년. 조정겸 부자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것만 여러 번이었다. 돌처럼 차갑던 두 사람도 내 앞에서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내가 임신을 확인한 날, 조정겸은 나를 품에 안고 태자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조윤헌은 내 무릎에 얌전히 엎드려 조금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머니, 누이는 언제 저와 놀 수 있습니까?" 너무도 다정한 나날이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한 세 식구인 줄 착각할 만큼. 진국대장군이 딸을 데리고 도성에 오기 전까지는. 언니와 얼굴이 닮은 유정월. 이름난 승려는 그녀가 언니의 환생이라고 단언했다. 조정겸은 그녀를 아내로 맞겠다며 정명전 앞에 사흘이나 무릎을 꿇었다. 조윤헌은 그녀의 손을 잡고 살갑게 어마마마라 불렀다. 내게는 남의 자리를 차지한 가짜라고 욕했다. 조정겸이 약속을 저버린 것보다 더 아픈 건, 내 손으로 키운 아이가 쏟아 내는 모진 말이었다.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현실이 보였다. 아이를 무사히 낳아 이 감옥에서 함께 벗어나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유정월이 또 무심한 듯 한마디를 던졌다. "봉의도 장씨 가문의 딸이 아닙니까? 아이를 낳으면 황손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겠습니까?" 조윤헌의 눈에 제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살기가 어렸다. 조정겸은 홍화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이마가 터져 피가 흐르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소첩은 의술을 압니다. 뱃속 아이가 딸이라는 것도 진작 확인했습니다. 결코 황손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정겸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유정월에게 매수된 태의가 내 배 속에 든 것은 아들이라고 하자, 그 말만 믿었다. 조정겸은 내 얼굴을 움켜쥐고 입 안으로 홍화 탕약을 들이부었다. 목소리만은 그해 처음 잠자리를 하며 나를 달래던 때처럼 부드러웠다. "나원아, 너는 사생아에 불과하다. 동궁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네 몫이 아닌 것까지 탐내지 마라." 쓴 약이 목으로 넘어가자 혼까지 떨릴 만큼 아팠다. 내 몸에서 나온 아이가 딸인 것을 보고, 유정월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정말 딸이었습니까?" 조정겸의 눈에 무슨 감정인지 모를 것이 스쳤다. 이내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나원아, 우리에게는 또 아이가 생길 거야." 나는 노을빛 비단에 수놓인 석류 무늬를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그렇겠습니까?" 황후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다시 피로 젖은 이부자리를 보고서야 한숨과 함께 허락했다. "열흘 뒤면 정월 보름 등불 축제가 열린다. 그날 밤에는 궁문 경비가 느슨할 테니, 네 어미와 함께 떠나거라." 나는 침상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은혜에 감사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 조정겸. 우리에게 다시 아이가 생길 일은 없어.' 제2화 오랫동안 혼미한 잠에 빠져 있었다. 꿈결에 누군가 쉰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듯했다. "나원아,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 눈을 뜨니 조정겸 부자가 침상 앞에 서 있었다. 귀하게 자란 태도부터 냉정함까지, 부자는 꼭 닮았다. "이번 일은 내가 네게 잘못했다. 원이 동궁에 들어오면 너를 양제(良娣: 태자의 상급 후궁)로 올려 주마. 훗날 내가 즉위하면 단 한 사람 아래에만 있는 귀비가 될 것이다." 양제든 귀비든,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줄에 매인 인형처럼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조윤헌은 그 반응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장씨, 그게 무슨 태도야?" 나는 아무 감정도 없이 조윤헌을 바라보았다. 겨우 옹알이를 하던 아이를 내 손으로 키워, 이제 제법 훤칠한 소년이 되었다. 친자식에게 쏟을 정성보다 더한 마음을 기울였건만. 돌아온 말은 천한 사생아, 남의 자리를 차지한 가짜라는 욕설이었다. 무심한 내 눈빛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조윤헌은 내 팔을 홱 잡아당겨 사납게 물었다. 살점이라도 뜯어 낼 기세였다. 그래도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조윤헌이 멈칫했다. "어머니, 아프지 않습니까?" 살이 찢기는 아픔이 대수일까. 친자식처럼 여긴 아이에게 받는 모욕이 이토록 아픈데. 조윤헌이 나를 비웃었다. "하긴, 사생아 주제에 아이 하나로 평생 호강하게 됐는데, 이 정도 아픔이 대수겠어?" 줄곧 말이 없던 조정겸이 호통쳤다. "그만하거라, 조윤헌!" 조윤헌은 옆으로 물러서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조정겸은 궁녀에게 태의를 불러 내 상처를 싸매게 하라고 일렀다. "윤헌은 아직 어리다. 너까지 아이와 똑같이 굴 필요는 없다." 나는 눈을 내려 깔아 그 안에 어린 조소를 감췄다. "소첩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궁녀가 돌아오자 조윤헌이 다급하게 물었다. "태의는 어디 있느냐?" "유... 유정월 아씨께서 연못에 빠지셨습니다. 태의들을 모두 그쪽으로 부르셨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정월이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얼굴을 가리고 가볍게 기침을 하니, 병색마저 아름답고 가련했다. "내 탓이오. 곧 태의를 불러 봉의를 돌보도록..."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정월이 정신을 잃었다. "원아!" "어마마마!" 조정겸이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조윤헌은 곁을 따라가며 괜찮은지 연신 물었다. 유정월은 조정겸의 어깨에 기대어 나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런 광경에는 진작 익숙해져 있었다. 그때 손목이 타는 듯 아프고 배가 뒤틀렸다.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도록 기침하며 눈물을 쏟았다. 나를 돌보던 궁녀가 전각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를 위해 태의원 앞에서 이마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조정겸의 말뿐이었다. "의술을 안다 하지 않았느냐? 제 몸은 제가 고치면 될 일이다." "원은 몸이 약하니 태의들이 곁을 지켜야 한다." 궁녀는 울면서 내 상처를 싸맸다. 나는 웃으며 달랬다. "괜찮아. 난 곧 떠날 거니까." 정월 보름까지는 엿새가 남았다. 조정겸 부자의 냉정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일로 마지막 미련마저 사라졌을 뿐이었다. 제3화 그 뒤 사흘 동안 조정겸 부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청소하던 궁녀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유정월이 감기에 걸려 태자와 황손이 밤낮으로 곁을 지킨다고. 떠나기 이틀 전,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리고 입궁했다. 동궁에 들어와 육 년 동안 단 하루도 뵙지 못한 어머니였다. 뜻밖에 다시 만난 어머니는 내 창백한 얼굴을 보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란아, 고생이 많았구나." 나는 어머니의 눈물을 닦으며 웃어 보였다. "이제 고생은 끝났습니다. 어머니, 울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첩을 내보내는 문서를 마련하려면 아직 밟아야 할 절차가 있다며, 서둘러 어머니를 데리고 나갔다. 헤어지기 아쉬웠지만 이틀 뒤면 떠날 터였다. 황후 마마께서 친히 약조하셨으니,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유산 뒤로는 피 섞인 분비물이 멎지 않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조정겸이 태의들의 진료마저 막아 두어, 나는 직접 처방을 썼다. 궁녀에게 몰래 궁 밖에서 약재를 구해 달여 오게 했다. 그날 저녁, 막 약을 먹으려는데 조정겸이 성난 얼굴로 들어왔다. 소매를 휘두르자 약그릇이 엎어졌다. 뜨거운 약이 닿은 흰 손목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조정겸의 눈에 아픔이 스쳤다가 이내 분노에 가려졌다. "장나원, 어찌 저주로 윤헌을 해치려 했느냐?" "네 손으로 키운 아이가 아니더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부인했다. "소첩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뒤따라온 유정월이 금침을 빼곡히 꽂은 저주 인형을 내 이마에 던졌다. 맞은 자리가 곧장 화끈거렸다. "봉의, 내가 밉거든 나를 해치면 될 것을. 어찌 윤헌에게 이러는 것이오?"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유정월이 울부짖었다. "제 자식의 유해까지 써 가면서! 어찌 그리 모질 수 있소?" 끝내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힘없이 조정겸의 품에 기대었다. 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말에는 독이 서렸다. "전하, 고승께서 봉의의 딸이 윤헌에게 화를 부를 팔자라 하셨습니다. 저 인형과 함께 불태워야 우리 윤헌이 무사할 수 있답니다." "안 됩니다!" 온몸을 갉아먹는 통증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침상에서 비틀거리며 떨어진 나는 조정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옷자락을 붙들었다. "전하, 그러지 마십시오. 이렇게 빕니다." 조정겸의 얼굴에 망설임이 어렸다. 그때 조윤헌을 돌보는 상궁이 넘어질 듯 달려 들어왔다. "전하... 태자 전하! 황손께서 피를 토하십니다!" 조정겸은 낯빛이 변하더니 유정월을 데리고 급히 조윤헌의 침전으로 향했다. 맨발로 뒤쫓는 사이 날카로운 돌에 발바닥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아픈 줄 몰랐다. 전각에 들어서자 궁녀와 환관들이 바닥 가득 무릎을 꿇고 있었다. 조윤헌은 조정겸에게 안겨 연거푸 피를 토했다. 그럴듯해 보였지만 나는 단번에 거짓임을 알아챘다. 내가 조윤헌에게 사람을 놀리라며 가르쳐 준 속임수였으니까. 나는 문짝에 기대어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윤헌아, 정말 네 누이 때문에 아픈 거니?" 조윤헌은 찔리는지 내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피를 한 모금 뿜고 조정겸의 품에서 기절했다. 유정월이 달려들어 목이 찢어질 듯 울었다. "가여운 윤헌아! 길러 준 어미는 역시 낳아 준 어미만큼 아이를 아끼지 않는구나. 이 어미가 너무 늦게 돌아왔어. 내가 네게 못 할 짓을 했구나!" 조정겸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죽은 아기는 불길하다. 그대로 두면 황손의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보명전의 승려들은 시신을 불태워 천도하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죽을힘을 다해 보명전으로 달렸다. 도착했을 때, 마침 내 아기가 거센 불길 속으로 던져지고 있었다. "아가!" 나는 눈을 부릅뜨고 비명을 지르며 불길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뒤따라온 조정겸에게 가로막혔다. "나원아, 그만 떼쓰고 나와 돌아가자."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몰랐다. 나는 조정겸에게서 벗어나 필사적으로 앞으로 기었다. 조정겸이 나를 일으켜 세우려 잡아당기자, 나는 있는 힘껏 그를 물었다. 피와 눈물이 뒤섞여 떨어지고, 바닥을 긁는 열 손가락이 줄줄이 핏자국을 남겼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내 아기를 구하고 싶었다. 그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기를 감싼 포대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재를 조금 움켜쥐었을 뿐. 바람에 휘말린 불길이 팔을 덮쳤다. 살갗 타는 냄새가 멀리 퍼졌다. "아가, 내 아가..." 조정겸이 나를 끌어 일으켰다. 불에 덴 팔을 본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장나원, 미친 것이냐?" 나는 아기의 유골을 두 손에 받쳐 들었다. 눈물이 두 뺨을 타고 쏟아졌다. "그렇습니다. 미쳤습니다." "제 딸을 잃은 날부터 그랬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전일지도 모릅니다. 억지로 장나원이 되어 동궁에 들어온 그날부터..."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격해진 마음에 묵은 병들이 한꺼번에 도진 듯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피가 울컥 쏟아졌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작고 보드라운 여자아이가 어머니라 부르며 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내 아기였다. '가여운 내 아가. 다음 생에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렴. 나처럼 무능한 어미는 다시 만나지 말고.' 제4화 아득한 꿈을 꾼 것 같았다. 푸른 하늘과 구름 아래 초원이 물결쳤다. 젊은 장군이 말을 달려와, 북쪽 설산의 늑대 우두머리를 잡아 혼인 예물로 주겠다고 했다. 너무도 소중한 광경이라 오히려 꿈인 줄 알았다. '이 꿈속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누군가 내 손을 붙들고 울며 불렀다. "아란아, 살아야 해. 이제 곧 집에 갈 거야." 살아야 했다. 내게는 아직 어머니가 있었다. 눈을 뜨니 침전이었다. 조정겸 부자가 침상 곁에 엎드려 있었다. 꼭 닮은 두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피로도 감추지 못했다. "나원아,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 "어머니, 어머니...!" 조윤헌이 꿈에서 놀라 깨어나자 조정겸도 잠을 깼다. "네 어머니께 사죄하거라." 명령이 떨어지자 조윤헌은 곧장 무릎을 꿇고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누이만 생각하시고 저는 돌보지 않으실까 두려웠을 뿐입니다. 노여움을 풀어 주십시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조정겸에게 물었다. "아기는 어디 있습니까?" 조윤헌의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조정겸의 검은 눈에는 후회가 역력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조정겸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아기를 군주(郡主: 황족 여식에게 내리는 작위)로 봉해 달라 청했다. 호은사에 위패도 세웠으니, 다음 생으로 가는 길에 탈은 없을 것이다." "책봉 칙서도 이미 마련되었다. 이번 일은 윤헌의 잘못이나, 아이도 뉘우치고 있다. 어미인 네가 아이와 똑같이 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나는 샛노란 칙서를 받쳐 들고 허탈하게 웃었다. 유골마저 흩어져 다시 태어날 길도 없는데. '죽고 나서 이런 허울뿐인 이름을 얻은들 무슨 소용일까?' "어머니." 조윤헌이 내 소매를 붙들고 기대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내일이 생신이니, 아버지와 제가 함께 보내도 되겠습니까?" 크고 작은 두 얼굴이 꼭 닮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마음에는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뜻은 없었다. 지난 육 년에 좋은 기억 하나쯤 더 남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정겸 부자는 끝내 나를 실망시켰다. 단장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동궁에서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기다렸다. 찾아온 것은 유정월의 궁녀뿐이었다. 궁녀는 거만하게 말했다. "태자 전하와 황손 전하께서는 저희 아씨와 등불 구경을 가셨습니다. 사생아의 생신 따위를 함께 보내실 리 없지 않습니까." 그다지 가슴 아프지도 않았다. 버림받는 일에는 이미 익숙했다. 짐을 꾸려 궁 밖으로 나가는 마차에 올랐다. 어머니와 함께 떠났다. 마차가 지나는 길 위로 풍등이 하늘 가득 빛났다. 소원을 적어 띄운 등불들이 도성 전체를 대낮처럼 밝혔다. 마차 밖에서 행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만 개의 풍등이 모두 태자 전하와 황손 전하께서 미래의 태자비를 위해 올리신 거라 하오." "등마다 두 분 전하께서 친히 축복의 글을 쓰셨다지." 어머니가 안쓰러운 손길로 내 창백한 얼굴을 쓸어 주었다. "아란아, 마음 아파하지 마라. 이 어미가 곁에 있잖니." 나는 어머니의 어깨에 기대어 창밖을 보았다. 마침 성벽 위의 조정겸과 나머지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은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내 자유를 얻을 것이다. 남은 생에는 다시는 저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