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章
냉전 3일째, 약혼자인 정승현은 자신의 비서 임세라가 제안한 드라이브 여행을 내가 보란 듯이 받아들였다.
정승현은 내가 예전처럼 질투하며 속을 긁을 줄 알았지만, 한 달 만에 돌아와 보니 나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정승현이 임세라를 위해 내 프로젝트를 빼앗았을 때, 나는 홧김에 사직서를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발 벗고 나서서 기획안까지 대신 써 줬다.
임세라에게 연말 보너스를 주려고 내가 공들여 완성한 설계를 망쳐 놓았을 때도, 나는 더 이상 나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쏟아지는 오명을 다 뒤집어쓰고 그에 따른 처분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임세라를 파격 승진시켜서 이사 자리에 앉히겠다고 할 때조차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가진 지분을 전부 내놓고 정승현더러 알아서 나누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들이 연이어 지속되자, 임세라는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우쭐해 있었다.
“제 말이 맞죠? 지원 씨 같은 성격은 세게 나가면 안 되고 차갑게 식혀야 먹혀요.”
“며칠 떠나 있었던 게 효과가 있었던 거예요. 대표님을 잃을까 무서워서 저렇게 순해진 거죠.”
정승현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임세라가 똑똑하다며 연신 칭찬했다.
그러고는 나를 따로 불러서 승진과 연봉 인상을 약속했고, 처음으로 잊지 못할 결혼식을 치러 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여행을 다니는 동안 자신이 내 사직서를 수리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때 나는 정승현과 아주 깔끔하게 헤어졌다.
다신 얽힐 일 하나 없이 깔끔하게 말이다.
제1화
“지원 씨, 대표님이 이 기획안이 급하다고 하셔서요. 수고 좀 해 주세요. 퇴근 전까지는 꼭 끝내 주셔야 해요.”
정승현의 비서인 임세라가 실실 웃으면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 책상 위에 던져 놓았다.
나는 익숙하게 서류를 받아 들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임세라는 그것만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는 듯 다시 웃으며 말했다.
“저 이따 대표님하고 약속이 있어서요. 다 되면 대표님 책상에 올려놓으시면 돼요. 아, 나가실 때 대표님 사무실 청소도 좀 부탁드릴게요.”
말을 끝낸 임세라는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기분 좋게 돌아섰다.
동료들이 나를 보는 눈에는 동정이 담겨 있었다.
마치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도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대표인 정승현이 내 약혼자이면서도 임세라를 노골적으로 편애한다는 사실은 회사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승현은 임세라를 다른 회사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빼 와서 본부장 자리에 앉혔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내가 한 달을 매달려 따 왔고, 한 달 넘게 밤을 새워 마무리 단계까지 끌고 온 20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까지 임세라에게 넘겼다.
이 상황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자, 정승현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 프로젝트를 누가 맡을지 투표로 정하자고 했다.
다들 자기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줄줄이 내게 투표했고, 임세라가 받은 표는 정승현이 던진 한 표뿐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쪽으로 상황이 흘러가자, 정승현은 그 자리에서 크게 화를 내며 내가 회사에서 파벌을 만든다고 몰아붙였다.
프로젝트를 돌려주지도 않았고 사람들 앞에서 날 강등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내 편을 들었던 동료들의 월급까지 깎겠다고 했다.
이런 부당한 상황에 다들 화가 났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나중에 정승현은 공정해 보이려고 그랬을 뿐이라고 사과하면서, 임세라가 따돌림을 당할까 걱정됐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믿었지만 지금은 그저 우습기만 했다.
임세라의 업무 능력은 갓 들어온 인턴보다도 못했다.
또한 공정함을 위한 것인지 그냥 편애인지는 동료들 눈에 다 보이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정승현 혼자만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았다.
위층에서 인기척이 나서 고개를 들자 계단 입구에 정승현의 훤칠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쪽을 무심하게 한 번 훑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캐주얼한 정장으로 갈아입었고, 시더 향 향수 냄새가 여기까지 희미하게 풍겨 왔다.
향수를 즐기지도 않는 정승현이 향수를 뿌렸다면, 그건 임세라가 선물한 향수였을 것이다.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늘 이런 식이었다.
시작은 정승현과 임세라가 서로 잘 자라는 인사를 주고받은 대화 기록을 내가 발견하고, 참지 못해서 몇 마디 캐물었던 일부터였다.
제2화
정승현은 내가 속이 좁다고 했다.
그러더니 화를 내면서, 어차피 의심하니 차라리 관계를 확실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임세라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내가 화를 낼수록 정승현은 더 보란 듯이 임세라를 감쌌다.
각종 모임에 임세라를 데리고 다녔고, 회사 회식 자리에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임세라에게 반찬을 집어 주고 입가를 닦아주기까지 했다.
내가 따지면 냉전에 들어갔고, 사과를 하면 그 틈에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서 나를 설득하면서 훈계 아닌 훈계를 했다.
나도 수없이 자신을 되돌아봤고, 내가 아량이 넓지 못해서 이 지경까지 왔나 싶었다.
냉전 3일째, 나는 몸이 아파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정승현은 그걸 보고도 못 본 척하더니 보란 듯이 짐을 챙겨 임세라와 여행을 떠났다.
그때 나는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
내가 속이 좁으니 둔감해지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앞세워서, 자기 행동을 당당하게 포장해 온 것뿐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그 대화 기록을 설령 내가 보지 못했다고 해도, 정승현은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임세라와 붙어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 둘이 함께 출장을 다녀온 뒤로도 예전처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운동을 하러 다녔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가 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나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5년짜리 연애가 막을 내렸고 이 같잖은 연극도 끝이 날 때가 됐다.
기획안을 마무리했을 때 회사에는 나 혼자 남아 있었다.
휴대폰을 켜 보니 임세라가 SNS에 글을 연달아 올려놓았다.
배경은 레스토랑이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촛불과 함께 아주 훌륭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정승현이 우아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임세라의 스테이크를 썰어 주고 있었다.
피드에 달린 글은 이랬다.
[대표님이 직접 썰어 준 스테이크. 맛이 다를 수밖에 없지.]
협력사 사람들이 줄줄이 달라붙어서 둘이 꿀 떨어진다고 댓글로 아부하기 시작했다.
우리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 결혼식 피로연에 따라주는 와인을 마실 수 있냐고 물었다.
이에 정승현은 생략 부호를 남겼고, 임세라는 장난스러운 표정의 이모티콘을 달았다.
예전과 똑같이 그 누구도 해명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애매한 두 사람 관계에 화가 나서 정승현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남의 말에 멘탈이 무너졌다고 한바탕 한소리를 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기획안을 끝냈다는 메시지만 보내고 서류를 사무실에 놓아두었다.
하라는 대로 물까지 갈아 놓은 뒤 차를 몰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승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지원 씨, 저 임세라예요. 프로젝트 고생했어요. 언제 제가 밥 한번 살게요.]
전화받자마자 임세라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서 정승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맙다고 할 게 뭐가 있어. 원래 해야 할 일이잖아.]
[대표님, 지원 씨는 대표님 약혼자잖아요. 말씀 좀 곱게 하세요.]
임세라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나무랐다.
두 사람이 연인처럼 느껴지는 너무 익숙한 말투라 나는 피식 웃었다.
정승현은 늘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가 시간을 보려고 집어 들기만 해도 자기 사생활을 엿본다며 화를 냈다.
그런 사람이 임세라에게는 거리낌 없이 휴대폰을 내주었다.
누가 사이가 가깝고 먼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이상하게 평온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이제 와서 보니 별것도 아니었다.
정승현과 임세라는 웃으면서 몇 마디 주고받다가, 내가 아직 듣고 있다는 걸 그제야 떠올린 듯 건성으로 말했다.
[금방 갈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가 끊어졌다.
정승현이 말하는 금방은 아무리 짧아도 4시간이나 5시간이었다.
예전이라면 매번 초조하게 애를 태우며 기다렸겠지만 이번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뒤 서재로 가서 책상 위 달력을 봤다.
제3화
얼마 전 정승현과 임세라가 출장이라는 이름을 걸고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그 틈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예상한 대로 임세라와 함께 있을 때 정승현의 관심은 온통 그 여자에게 쏠려 있어서, 내용도 보지 않고 수리했다.
‘이제 3일 남았어. 3일 뒤 업무 인수인계만 끝나면 나는 완전히 떠날 수 있어.’
잠깐 생각한 뒤 해외 연구소의 지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우수 졸업생으로 그 연구소에 들어갔고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정승현이 회사를 세우는 데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자, 망설임 없이 그 자리를 포기하고 달려온 것이었다.
강현우 교수가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나는 뜻을 굽히지 않고 귀국했다. 그 뒤로는 정승현이 맨손으로 회사를 키우는 길에 함께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참 어리석었다.
마음은 언제든 순식간에 변하고, 나를 배신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쌓은 노력뿐이라는 것을 몰랐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나는 용건을 말했다.
한바탕 꾸중을 들을 줄 알았는데, 강현우는 한숨을 쉬더니 내 사정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다시 불러들일 생각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마음을 정한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했어요. 퇴사 문제도 다 정리했어요.”
[퇴사? 무슨 퇴사?]
놀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정승현이 문을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니 강현우와의 통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화면을 껐다.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던 참에 정승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바로 임세라가 보낸 메시지였다.
집에 가는 길에 길고양이를 만났는데, 일부러 가게까지 가서 소시지를 사 왔다는 내용이었다.
[귀엽네.]
정승현의 답장에 임세라한테서 곧바로 답이 왔다.
[고양이가 귀여워요? 제가 귀여워요?]
고양이를 안은 임세라가 입을 쭉 내밀면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린 셀카까지 딸려 왔다.
정승현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고양이도 귀엽지만 네가 더 귀엽지.]
내가 아직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정승현은 곧바로 웃음을 억누르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를 봤다.
“일찍 쉬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여기 서 있어?”
차가운 말투는 임세라를 대할 때와 완전히 달랐다.
조금 전 내가 퇴사를 말했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설명할 마음을 접었다.
“아직 못 끝낸 일이 있어서.”
“이 시간까지 무슨 집안일이 남았다고. 왜 계획을 안 하고 몰아서 하려고 해? 지원아, 잔소리하고 싶지 않은데 넌 미루는 버릇이 너무 심한 것 같아.”
정승현은 미간을 잔뜩 구기면서 원망의 말을 늘어놓았다.
미루는 버릇이 생긴 것은 정승현이 수시로 일을 불쑥 떠맡기기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다투며 내 사정을 설명하지도 않았다.
내가 잠자코 있자, 정승현도 더 말을 얹지 않고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 안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승현이 그렇게 웃는 모습은 오래 보지 못했다.
그저 임세라와 있을 때만 그렇게 즐거워했으니까.
더 신경 쓰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다 보지 못한 영어 자료를 꺼냈다.
5년이 지나는 사이 연구소의 연구 방향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설령 연구소로 돌아가고 강현우 교수가 도와준다 해도 내 실력이 받쳐 줘야 했다.
다행히 기초는 탄탄한 편이라 다시 따라잡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영어 잡지 보고 있어?”
자료에 집중하던 참에 정승현이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와 있었다.
정승현은 손을 뻗어 잡지를 집어 들고 두어 장 넘기더니, 다시 툭 던지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런 걸 왜 봐? 알아보기는 해?”
“그냥 보는 거야.”
나는 자료를 챙기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제4화
“무슨 일로 온 거야?”
예전에는 정승현이 먼저 말을 붙여 오면 나는 몸이 달아서 어쩔 줄 몰랐다.
내가 이렇게 냉담할 줄은 몰랐던지, 정승현은 잠깐 멈칫하면서 표정도 어딘가 어색해졌다.
“일이 있긴 해.”
“세라가 큰 프로젝트를 막 끝냈으니까 승진시키려고. 다른 직원들한테도 자극이 될 거고. 어떻게 생각해?”
정승현이 나를 봤다.
입으로는 내 생각을 물었지만, 이번에도 의견을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견 없어.”
“그런데 상이 있으면 벌도 있어야지. 안 그러면 팀이 안 굴러가.”
“너 프로젝트를 끝낸 게 한참 됐잖아. 그래서 당분간 현장으로 내려보내려고. 때가 되면 다시 올려 줄게.”
“걱정하지 마, 오래 안 걸려. 나도 큰 그림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넌 내 약혼자니까 당연히 지지해 줄 거지?”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말들에 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승현은 이제까지도 내가 퇴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작은 낌새만으로도 임세라의 기분을 읽어 내고, 사소한 부분까지 짚으면서 임세라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냈다.
그런데 약혼자인 내 사직서에는 자기 손으로 사인까지 해 놓고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음을 쓰는지 쓰지 않는지는 몇 마디만 들어도 바로 드러났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정승현은 예전처럼 따지려 든다고 여겼는지 금세 표정이 굳었다.
“반대해도 소용없어. 공지는 이미 내려보냈고 네 사무실도 세라한테 줬어.”
“발령을 받아들이든지 나가든지 알아서 해.”
정승현이 위협조로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우리 회사는 이미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나가기 전에 잘 생각해 봐.”
내가 떠날 리 없다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이런 일은 너무 많았다.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임세라의 말 몇 마디에 회사에서 내 자리는 계속 내려앉았다.
그때도 참았으니 지금은 더 못 떠날 거라고 정승현은 확신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반대한다고 안 했어.”
“그럼 그렇게 해.”
나의 대답 한마디에 정승현의 기분은 한결 가벼워진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내가 반대하지 않았으니 암묵적으로 동의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막 나가려던 정승현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다시 돌아왔다.
“여기 책상에 우리 사진 있었잖아. 왜 지금은 안 보여?”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책상뿐만이 아니라 휴대폰 배경 화면에도, 방 벽에도, 지갑 안에도 우리 사진이 있었다.
정승현은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고 나한테 뭐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진들은 정승현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결국 나를 사랑한다고 자신을 세뇌하기 위한 장치였다.
나중에야 난 내가 한 짓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알게 됐다.
그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은 내가 얼마나 광대였는지 비웃고 있었다.
더 설명할 마음이 없는 나는 그저 담담하게 답했다.
“액자가 깨져서 치웠어.”
“넌 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정승현은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발밑에 유리 조각이 없는지 살폈다.
“시간 날 때 다시 제대로 치워. 누가 다치면 안 되잖아.”
내가 더 날을 세우지 않는 걸 봤는지 정승현의 말투도 조금 풀렸다.
말을 마친 정승현은 몸을 일으켜 서재를 나갔다.
멀어지는 등을 보며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를 걱정한 말이 아니라 임세라가 다치면 안 된다는 뜻이 분명했다.
이 집은 우리 집이었고, 집 안의 모든 것을 내가 관리했다.
그리고 몇 달 전 서재 바닥에 떨어진 머리끈을 발견했고, 침실 베개가 옮겨진 걸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정승현이 임세라를 이 집에 여러 번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5화
그때는 참지 못하고 따졌다.
정승현은 내가 뭘 물을지 짐작했다는 듯 곧바로 증거를 내밀며 업무 때문이었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면서 질투가 심하고 속이 좁다며 나를 몰아세웠다. 내가 엉뚱한 생각을 한 것에 보복이라도 하듯 그 뒤로는 보란 듯이 임세라를 집에 데려왔다.
임세라가 나를 대할 때 드러내는 도발과 적의를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것들은 선을 넘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내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매일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 되짚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시간을 들여 파고들었다면 뭘 해도 성공했을 듯싶었다.
이튿날 아침, 정승현은 임세라의 승진 소식과 나를 제일 밑바닥으로 강등한다는 소식은 사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발표하는 동안에도 경계를 놓지 않았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일 없다는 듯 굴자, 그제야 내가 정말로 받아들였다고 믿었다.
정승현의 기분은 아주 좋아졌고 내 기분도 딱히 나쁘지 않았다.
그 뒤로 며칠, 정승현이 임세라의 축하 자리를 마련할 때 나는 비자를 준비했다.
두 사람이 놀이공원을 돌며 기분을 풀 때, 나는 짐을 정리했다. 마지막에 가져갈 물건은 캐리어 하나를 채우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 술자리에 나가 부추김 속에 러브샷을 할 때, 나는 모든 업무의 인수인계를 끝마쳤다.
...
이틀 뒤,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인사팀에서 마지막 절차를 마쳤다.
“나가시기 전에 대표실 한번 들르세요. 대표님이 찾으세요.”
인사팀 한지수 대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원래는 대차게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나는 오늘 밤 떠날 예정이었다.
정승현이 늘 그랬듯 임세라와 나가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오늘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는 날이었다.
5년을 함께했으니 작별에도 그럴싸한 형식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위층 대표실로 올라갔다.
문을 밀려던 참에 유리 벽 너머가 보였다.
정승현은 소파에 몸을 뒤로 젖힌 채 앉아 있었고, 긴 원피스를 입은 임세라가 그 무릎에 머리를 얹고 누워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정승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임세라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피해 줘야 하는지 고민하던 그때, 임세라가 먼저 나를 발견했다.
그러더니 놀란 척 꺅 소리를 지르면서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지원 씨,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정승현의 얼굴에도 긴장이 스쳤다.
살짝 헝클어진 정장을 급히 매만지더니 곧 나를 향해 화를 냈다.
“유지원,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내 허락 없이 사무실에 올라와서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 말은 정승현이 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다만 원래 표현은 유지원을 뺀 모든 사람은 마음대로 올라와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정승현이 나만 특별하게 대해 준다고 생각했지만, 인제 와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어차피 떠날 몸이니 새삼 놀랍지도 않았기에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인사팀에서 네가 나 찾는다고 하길래 왔어.”
정승현은 코웃음을 치더니, 성큼성큼 책상으로 다가갔다. 화를 삭이지 못하고 곧바로 내선 전화를 눌렀다.
이윽고 2분도 지나지 않아서 한지수 대리가 올라왔다.
“유지원 씨한테 내가 찾는다고 말했어요?”
정승현이 차갑게 묻자 한지수 대리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정승현의 차가운 얼굴과 옆에서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임세라를 번갈아 보다가, 긴장했는지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표님, 그게 기억이 잘 안 나서요...”
“허.”
그 말을 들은 정승현은 싸움에서 이긴 장군처럼 차가운 눈으로 나를 흘겨보면서,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재미있어? 유지원?”
“이쯤 하면 철이 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속셈이 그렇게 시커멓다니. 그렇게 못 믿겠으면 아예 내 사무실에 와서 하루 종일 나를 감시하지 그래?”
“아니면 내 몸에 카메라라도 달아서 궁금한 걸 실컷 채우든지.”
제6화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지원 씨도 걱정이 앞서서 그런 거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임세라가 정승현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리면서 나를 봤다.
“지원 씨도 오해하지 마세요. 아까는 제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좀 아팠어요. 대표님이 자신이 머리를 안마해주면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하셔서요.”
“저희는 다 회사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득의양양한 임세라의 눈빛은 오히려 내가 깊이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전부를 알지는 못했지만 이 얌체 같은 짓은 분명 임세라가 꾸민 거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한지수는 처세에 능한 사람이었다.
임세라가 정승현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 분위기가 이상해진 뒤로는 사실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말했다고 해도 정승현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잠자코 있자, 정승현은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설명할 필요 없어.”
“사사로운 건 사사로운 거고 회사는 회사야. 지금 회사에 있으니까 회사 규정대로 해!”
“유지원 씨는 회사 규정을 어겼으니 이번 달 성과급 전액 삭감하고 월급도 절반 깎으세요.”
그러자 한지수가 황급히 말했다.
“대표님, 유지원 씨는 이미...”
아무래도 내 퇴사 이야기를 하려던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정승현의 차가운 눈이 한지수 대리를 향했다.
“사정은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한 대로 하세요!”
한지수는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도 잠깐 생각한 뒤 나가려고 하는데 정승현이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화를 다 쏟아 낸 탓인지 정승현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지원아, 내가 널 일부러 몰아세우는 게 아니야. 이건 내가 만든 규정이야. 공사를 구분하지 않고 처벌하지 않으면, 앞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겠어?”
옆에 있던 임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지원 씨. 다음에 확실하지 않은 일이 있으면 대표님한테 여쭤보세요. 그게 어려우면 저한테 물어보셔도 되고요.”
정승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임세라를 바라봤다.
“역시 너는 회사만 생각해. 회사 일은 네가 누구보다 잘 아네.”
말을 끝낸 정승현이 나를 다시 흘겨봤다.
“넌 하루 종일 질투하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세라를 좀 따라 배우면 안 되겠어?”
‘뭘 배우라는 걸까? 남의 연애에 일부러 끼어드는 법을 배울까?’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면서 남을 도발하는 법을 배울까?’
‘아니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발목 잡고 넘어뜨리는 법을 배울까?’
나는 피식 웃었지만 굳이 오목조목 따져가며 짚어 줄 마음은 없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정승현은 내가 잘못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내 쪽으로 다가온 정승현은 흐트러지지도 않은 옷깃을 매만지면서, 무게를 실어 말했다.
“네가 왜 이러는지 알아. 그리고 너한테 실망한 것도 사실이야.”
“그래도 이번에 돌아와서 보니 확실히 많이 철이 들었어. 그걸 칭찬하는 의미로 내일 웨딩 촬영하러 가자.”
“결혼식도 정식으로 올릴 거야. 그렇다고 너무 우쭐대지는 마. 결혼은 그냥...”
“결혼?”
나는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웃고 옷깃에 얹힌 손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준비해 둔 사직서 내용증명을 정승현 앞으로 내밀었다.
“우린 진작에 헤어졌어.”
“아, 회사도 그만뒀으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