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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신랑을 바꿨다
남자친구는 자신이 성욕이 없는 편인 데다가 다른 사람과 몸에 닿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5년을 사랑했지만, 우리의 진도는 손을 잡고 포옹하는 게 끝이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어도 남자친구는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그저 남자친구가 원래 성격이 냉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야 남차친구가 자기 교수님의 딸과 아이를 갖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며 남자친구는 설명 아닌 설명을 덧붙였다. “정자만 빌려주는 거야. 교수님 유언이라서 내가 거절할 수가 없어.” “게다가 다혜한테는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 그 말에 나는 그저 살짝 웃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는 찬성이야.” 이미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Chapters (1)
第1章
남자친구는 자신이 성욕이 없는 편인 데다가 다른 사람과 몸에 닿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5년을 사랑했지만, 우리의 진도는 손을 잡고 포옹하는 게 끝이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어도 남자친구는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그저 남자친구가 원래 성격이 냉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야 남차친구가 자기 교수님의 딸과 아이를 갖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며 남자친구는 설명 아닌 설명을 덧붙였다.
“정자만 빌려주는 거야. 교수님 유언이라서 내가 거절할 수가 없어.”
“게다가 다혜한테는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
그 말에 나는 그저 살짝 웃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는 찬성이야.”
이미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제1화
강도언과 나는 5년을 만났다.
사귀기 전, 강도언은 이성과의 신체 접촉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했다.
“미안해. 받아들이기 힘들면 우리 헤어져도 돼.”
나는 그저 잘난 사람에게는 별난 구석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와 몸이 닿는 걸 꺼리는 강도언의 성향도 이해해 주었다.
우리는 5년 내내 서로 선을 지키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강도언의 은사인 임한수 교수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전화를 받은 강도언은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가,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를 하던 중, 강도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다혜랑 아이를 가질 생각이야.”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뭐라고?”
강도언의 표정은 담담했다.
“교수님 병은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아. 교수님의 가장 큰 바람은 자신의 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거야.”
“그동안 나는 교수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 그러니 내가 도와드려야 해.”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 다혜도 남자친구를 만나거나, 아니면...”
강도언은 미간을 문지르며 내 말을 끊었다.
“감정 문제를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게나 정할 수 있어?”
“게다가 그저 아이 하나만 낳는 것뿐이야. 정자만 빌려주는 셈이지. 다혜랑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강도언의 말투는 마치 아주 평범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처럼 지극히 평범했다.
나는 수저를 식탁에 거칠게 내려놓고 강도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강도언,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
“한 달 뒤면 우리 결혼이야. 그런데 지금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겠다고?”
강도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면서 눈빛에는 짜증이 살짝 스쳤다.
“다혜는 교수님 딸이야.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어떻게 남이라고 해?”
“자기 오빠한테 임신시켜 달라고 하는 여동생이 어디 있어?”
나는 이해할 수도, 이해할 방법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는지 강도언은 잠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평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은서야, 괜한 고집 부리지 마.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리자, 강도언은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강도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래. 지금 바로 갈게.”
강도언은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빠르게 집을 나섰다.
정성껏 준비한 아침 식사였지만 강도언이 먹은 것이라곤 밥 한 술뿐이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진 사람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나는 무심코 강도언을 알게 됐던 기억을 떠올렸다.
대학 시절, 강도언은 유명한 얼음 왕자였다.
그 닉네임처럼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강도언에게 다가가려는 사람은 누구든 냉정한 태도에 상처를 입고 물러서야 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심지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부딪히며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렇게 3년을 얽히고설킨 끝에 강도언은 결국 내 구애에 흔들렸다.
사귀고 난 뒤에도 강도언은 여전히 차갑고 무뚝뚝했지만 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무리 차가워도 강도언은 내 남자친구였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결혼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성과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게 싫다고 단호하게 말했던 사람이 바로 강도언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저 정자만 빌려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 역시 강도언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 깊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것은 강도언이 아니라 임다혜가 보낸 영상이었다.
영상 속 강도언은 병상 앞에 서 있었고, 임한수 교수는 강도언의 손을 붙잡은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언아, 내 상태는 내가 알아. 이번 생에 더 바랄 것도 없어. 다혜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만 바라지.”
강도언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어 임다혜의 애처롭고 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아빠의 유언이니까 오늘 밤에 방에서 기다릴게.]
그 말에 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윽고 영상이 끝나는 순간, 강도언의 낮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제2화
영상이 끝났는데도 나는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뒤에 마지막 부분을 몇 번이나 다시 돌려 봤고, 강도언이 ‘그래’라고 대답하는 걸 거듭 확인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살아남으려는 것처럼 나는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13번째로 그 대답을 들었을 때, 핸드폰 화면 위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황급히 얼굴을 훔치고 나서야 어느새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음이 아픈지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아니면 서럽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조금뿐이었다.
‘나는 왜 울고 있는 걸까?’
나는 곧 욕실로 가 얼굴을 씻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게 나인가?’
거울 속에는 머리는 헝클어지고 피부는 누렇게 뜬 데다가 두 눈까지 퉁퉁 부은 여자가 서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람을 사랑하다가 자신의 모습까지 알아볼 수 없게 되는 일이 정말로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오랫동안 강도언을 깊이 사랑했고, 결혼을 앞둔 우리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실은 이미 새까맣게 썩은 채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어지러운 생각을 가라앉힌 뒤, 휴대폰을 들어 SNS에 글을 올렸다.
[결혼식에 신랑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신랑 하실 분?]
글을 올리자 친구들이 줄줄이 농담을 보내왔다.
내가 강도언이라면 죽고 못 산다는 걸 주변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기에, 그 글을 진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축하로 가득한 댓글들을 바라보며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 나는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송건우,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자란 남들이 말하는 소꿉친구였다.
그렇다고 사이가 특별히 살가웠던 건 아니었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했다.
어릴 적 송건우는 늘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내 뒤는 자기가 봐 주겠다며 털털하게 큰소리를 치곤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송건우는 밖에만 나가면 나를 자기 꼬붕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게 돼서야 우리는 서로 갈라져서 각자 다른 도시로 갔다.
그 뒤로는 연락도 거의 끊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강도언을 쫓아다니느라 어린 시절의 친구 관계를 먼저 밀어냈던 것 같다.
‘그런데 건우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었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이, 꼬붕. 대장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장난기에 마음속 그늘이 조금 걷히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웬 전화야?”
송건우는 드물게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SNS에 쓴 말 진심이야?]
나는 달라진 기색을 알아채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왜, 네가 하려고?”
[응. 안 돼?]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을 잃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결혼 상대를 바꿀 거라면 송건우가 가장 잘 맞는 사람이었다.
집안을 봐도 그렇고 서로 쌓아 온 감정을 봐도 그랬다.
이에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런데 이유는 알고 싶어서 그러지.”
[이유? 당연히 네가 좋아서지.]
송건우의 목소리가 다시 평소의 털털한 결로 돌아왔다.
[내가 너 좋아한 지는 한참 됐어. 꿈에서도 널 데려가고 싶었거든? 근데 네가 먼저 이렇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잖아. 그러니 이 기회를 내가 채 가야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건우야, 이거 결혼이야. 장난이 아니라고.”
[알아.]
송건우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오는 것만으로는 안 돼. 강도언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해.]
‘강도언보다 더 사랑하라니...’
그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래.”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기 일 정리하고 연락할게.”
송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
원래 영리한 사람이라, 뭘 물어야 하고 묻지 말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SNS 글을 지웠다.
그러고는 송건우를 친구 목록 맨 위에 고정하고 이름도 남편으로 저장해놨다.
강도언이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갖겠다면, 나도 남편을 다른 남자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제3화
강도언은 계속 집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도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임다혜가 띄엄띄엄 보내오는 도발적인 의도가 다분한 영상을 통해서, 두 사람이 어느 선까지 갔는지 짐작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애매한 행동을 보면서도 내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예정대로 결혼식 준비를 이어 갔다.
그저 달라진 것은 단 하나, 내가 보낸 청첩장에 적혀진 신랑 이름이 더 이상 강도언이 아니라 송건우라는 사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서 언니, 신랑 이름이 잘못 쓰여진 거 아니에요?]
“아니? 제대로 쓰여진 거 맞아.”
내 말투는 평온했다.
“신랑이 바뀌었거든. 송건우라고 내 소꿉친구야.”
청첩장을 확인한 내 지인들은 하나같이 놀라서 내게 전화나 문자 폭탄을 날렸다.
[은서야, 네 남친이랑... 아니, 강도언 씨랑 싸운 거야?]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강도언을 향한 마음을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었다.
우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강도언을 위해 어떤 비굴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 늘 갑이었던 강도언은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강도언은 언제나 그랬다.
차갑고 고고한 얼음 왕자처럼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정상까지 기어오르는 모습을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다 다시 처참하게 추락해 부서지는 것까지 냉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더는 설명하지 않고 그저 웃어넘겼다.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저마다 농담을 던졌다.
연인끼리 결혼을 앞두고 싸우거나, 아니면 서프라이즈 비슷한 그런 장난쯤으로 생각한 것이다.
3년이나 끈질기게 매달려서 겨우 손에 넣은 강도언을 내가 정말 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나조차도 신랑을 바꿨다고 말하는 순간, 잠시 멍해졌으니까 말이다.
나도 이 관계를 이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이편이 나았다.
적어도 이 대수롭지 않은 농담을 강도언에게 전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서 나 또한 결혼 준비에 쓸 시간이 더 많아졌다.
...
일주일쯤 지나 집에 돌아온 강도언은 꽤 지쳐 보였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 눈 밑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강도언의 목에 남은 키스마크 자국을 보고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고생했어.”
나는 무덤덤하게 한마디 건넸다.
강도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 신발을 갈아 신은 뒤 내 옆에 앉았는데 눈빛이 복잡했다.
“무슨 일 있어?”
내가 강도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응. 결혼은 일단 취소하자. 교수님이 돌아가셨어. 상중이라 당분간 결혼할 수 없어.”
말을 마친 강도언의 눈에 드물게 미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미안해, 은서야...”
나는 의아한 눈으로 강도언을 바라보았다.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걸까?’
‘이 결혼식이 내 오랜 소원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남편이 될 사람인데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서 미안한 걸까?’
나는 알 수도 없었고 이제는 관심도 없었다.
“응, 알았어. 교수님 잘 보내 드려.”
강도언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눈빛에는 의아해하면서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왜 이렇게 평온한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임다혜와 아이를 가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크게 화를 내면서 안절부절못했었다.
하지만 강도언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교수님 장례식이니까 나랑 같이 가.”
말투에는 명령하는 듯한 기색이 가득 묻어 있었고, 나와 의논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남의 약혼자에게 자신의 딸과 아이를 갖게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교수였지만, 이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그러니 죽은 사람에게 품은 원망도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덕분에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철저히 알게 되어서 오히려 조금 고마울 따름이었다.
제4화
간단히 준비를 마친 뒤, 나는 강도언과 함께 출발했다.
장례식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나와 강도언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달려왔다.
“도언 오빠...”
바로 임다혜였다.
상복을 입고 머리에 흰 핀을 단 채,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급히 다가가서 임다혜를 품에 안은 강도언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가득했다.
“다혜야, 너무 상심하지 마.”
임다혜는 강도언의 품에 기댄 채 흐느끼며 말했다.
“그래도 오빠가 곁에 있어 줘서 다행이야.”
두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저 둘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운 커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효녀인 임다혜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빈소를 지키기는커녕, 이곳에서 외간 남자와 다정하게 붙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화를 내면서 비꼬는 말을 서슴없이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사람을 그대로 무시하고 빈소로 향했다.
나는 고인을 추모하러 온 것이지 두 사람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러 온 게 아니었다.
강도언은 그 모습을 봤는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입을 뻐끔거리면서 내게 뭔가 말을 하려는 듯했다.
“오빠, 나랑 좀 같이 있어 줘.”
하지만 임다혜의 목소리에 강도언은 다시 생각을 거두었다.
“그래.”
강도언은 부드럽게 웃었다.
며칠 함께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은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구석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막지 않았다. 그저 빈소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문했다.
“은서야, 와 줘서 고마워.”
옆에서 임다혜의 어머니 최미숙이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슬픔에 잠긴 눈에는 죄책감이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
“다혜랑 도언이 일은 나도 처음에는 반대했어. 그런데 도언이가 워낙 속이 깊은 아이라, 교수님의 마지막 유언은 꼭 들어드려야 한다고 하도 그러더구나.”
“은서야, 마음이 많이 상했지?”
최미숙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내 귀에는 그 말이, 임다혜와 관계를 맺은 것조차 마치 강도언이 속이 깊어서 한 일이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거절한다면,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되는 걸까?’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하자, 최미숙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도언이는 성격이 좀 차가운 애야. 우리 집에서나 좀 활발해지는 편이고. 은혜를 갚으려고 그런 결정을 내린 거니까, 절대로 원망은 하지 않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묻고 싶었다.
본인의 남자가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겠다고 간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길 수 있겠느냐고.
나는 어떤 여자라도 그런 일을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물론 나도 신랑을 바꿀 생각까지 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 일로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
“괜찮아요, 사모님. 이해해요.”
내가 이렇게까지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지, 최미숙은 잠시 멈칫하다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해해 주면 정말 다행이지. 사실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아도 돼. 도언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 은서 너일 테니까.”
‘걔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예전 같았다면 이런 말을 듣고 속으로 기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 순간에도 내가 떠올랐을까?’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만났으면서 왜 나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나는 마치 강도언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강아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강도언은 제 갈 길을 가다가 본인이 기분이 좋을 때만 걸음을 멈추고, 내가 가까이 다가올 기회를 한 번씩 허락했을 뿐이었다.
최미숙은 내 귀에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강도언이 얼마나 철이 들었는지, 임다혜가 얼마나 효심이 깊은 사람인지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두 사람의 옛날 일화까지 꺼내 들었다.
마치 내가 강도언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이.
자기 딸이 끼어들어서 우리의 관계를 망가뜨린 것이었고, 그렇다면 미안해해야 할 쪽은 그 사람들이었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강도언은 자신이 이미 임다혜의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곁을 지켰다.
조문객들이 하나둘 떠난 뒤, 나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차 옆에 다다르자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그 자리에 앉은 임다혜가 나를 보며 미안한 듯 웃었다.
“미안해요, 은서 언니. 저 아빠 묘지도 한번 보러 가려고요. 혹시 빠진 게 없는지 확인해야 해서요.”
나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버지 묘지를 보러 가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왜 굳이 나에게 사과하는 걸까?’
최미숙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차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세 사람은 마치 한 가족 같았고 나만 타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표정하게 뒷좌석으로 가서 문을 열려고 했지만, 그 순간 딸깍 소리가 들렸다.
차 문이 잠기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뜻이야?”
임다혜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보지도 않은 채 강도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오빠, 중요한 순간에는 저랑 오빠, 그리고 엄마 셋만 함께하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강도언이 대답하기도 전에 최미숙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도언이는 은서 약혼자잖아.”
“그게 뭐가 중요해요?”
임다혜가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오빠는 대학에 들어간 뒤부터 우리 가족이랑 한 식구처럼 지냈어요. 그런데 이제 아빠가 돌아가셨잖아요.”
“전 그냥 다른 사람이 묘지를 고르는 이런 신중한 일에 끼어드는 게 싫은 것뿐이에요. 그게 그렇게 잘못하는 거예요?”
제5화
최미숙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딸의 편을 들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일까지 떳떳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최미숙이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강도언이 결정을 내렸다.
“택시 타고 돌아가.”
슬쩍 나를 바라보던 임다혜는 입가에 비웃음을 걸면서 차창을 올렸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강도언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임다혜의 기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나를 뒤로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금세 바닥에는 얇게 눈이 쌓였고, 나는 허리를 굽혀 눈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차갑네.’
하지만 내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만큼 차갑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강도언은 옷을 챙기고 있었다. 들어오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바로 입을 열었다.
“다혜가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내가 가서 한동안 같이 있어 줄 테니까, 너는 며칠 동안 버스로 출근해.”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임다혜의 기분이 안 좋으니, 옷을 챙겨서 같이 지내며 달래 주겠다는 뜻일까?’
난 더 묻지 않았고 강도언 역시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옷을 다 챙긴 강도언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
그 뒤로 일주일 내내 강도언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연락조차 한 통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강도언이 매일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임다혜가 열심히 내게 영상이나 사진을 참 꾸준하게도 보내줬기에.
그때가 돼서야 나는 강도언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랐을 뿐이었다.
임다혜에게는 온갖 영양식을 만들어 주었다.
직접 새우 껍질을 까 주고 갖가지 선물도 골라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놀이공원에도 함께 가고 관광지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헀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예전부터 강도언과 함께하고 싶다고 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강도언은 늘 너무 유치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사실 나는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임다혜가 보내온 영상과 사진을 하나씩 저장했을 뿐이었다.
손에 잡고 있던 일을 모두 처리한 뒤,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지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모두 놀랐다.
“언니, 회사 잘 다니고 있었잖아요. 근데 왜 갑자기 그만둬요?”
나는 웃으며 설명했다.
“타지에서 너무 오래 지냈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지내려고.”
누군가 물었다.
“그럼 형부도 언니랑 같이 내려가요?”
강도언이 지금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애써 왔는지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남자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친구가 나를 말렸다.
“은서야, 그래도 돌아가지 마. 결혼하자마자 떨어져 사는 건 안 좋잖아.”
그때까지도 친구들은 상황을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강도언 하나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이곳까지 와줬다.
‘그런데 내가 불평 한 번 해본 적이 있었나?’
‘내가 더 사랑하니까 나를 희생하는 게 당연한 걸까?’
그런 질문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떨어져 살지는 않을 거야.”
그 말을 하고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내게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친구들이 믿지 않는다면 굳이 믿으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회사 일을 모두 정리한 뒤, 대표의 만류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도언이 집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임다혜까지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원래 서로 기대고 있던 두 사람은 재빨리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못 본 척하고 내 사무용품을 품에 안은 채 침실로 향했다.
“왜 돌아왔어? 오늘 출근 안 해?”
강도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품에 안고 있는 사무용품을 본 강도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회사... 그만둔 거야?”
“응.”
나는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사무용품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강도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만둬?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임다혜가 강도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언니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언니도 이제 젊은 사람들이랑 경쟁하기에는 나이가 있잖아요. 세월 따라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도 있는 거죠.”
겉으로는 나를 위해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상 내 나이를 빗대어 비꼬는 말이었다.
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넌 정말 쓸모가 없구나!”
강도언은 못마땅하다는 듯 몇 마디 더 내뱉다가, 임다혜가 달래 주고 나서야 겨우 화를 가라앉혔다.
임다혜가 내게 보낸 도발적인 영상과 사진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고마워했을지도 몰랐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내 휴대폰이 울렸다.
그러나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임다혜가 뭔가를 본 모양이었다.
임다혜는 순식간에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과장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머, 이, 이 남편은 누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