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장 속 새

GoodNovel new Completed

혼례를 올리던 날, 배현우는 나를 저택 밖으로 내보내 남몰래 첩으로 두었다. 낮에는 제 부인 곁을 지키고, 밤이면 몰래 내 침상으로 찾아왔다. 한창 정이 무르익었을 때, 배현우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연희야, 넌 날 사랑하느냐?"

Chapters (1)

第1章

혼례를 올리던 날, 배현우는 나를 저택 밖으로 내보내 남몰래 첩으로 두었다. 낮에는 제 부인 곁을 지키고, 밤이면 몰래 내 침상으로 찾아왔다. 한창 정이 무르익었을 때, 배현우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연희야, 넌 날 사랑하느냐?" 제1화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마치 새삼 덩굴처럼 배현우의 어깨에 매달리며, 그 없이는 살 수 없는 듯했다. 배현우의 땀이 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마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같았다. 정사가 끝난 뒤, 나는 배현우가 옷을 입는 것을 시중들었다. 몸이 조금 떨리고 힘도 빠져 있었다. 배현우는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나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입술을 깨물며 배현우에게 간청했다. "소녀도 정식으로 첩이 될 수는 없겠습니까?" 배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연희야, 말을 잘 듣거라. 나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배현우가 혼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정실로 맞이한 부인은 명문가의 귀한 딸이어서 지금 첩을 들인다면 우씨 가문의 미움을 사게 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 대가는 너무 컸기에 난 감히 바라지도 못했다. "지금이 아니라, 훗날... 몇 년 뒤에라도 안 되겠습니까?" 배현우의 차가운 눈빛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입을 다물었다. 입안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배현우는 언짢은 기색으로 떠났다. 내가 정식으로 첩이 되게 해 달라고 한 것이 지나친 욕심이라 여겨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 뒤로 보름 동안 배현우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대문을 지키는 어멈과 문지기는 여전히 문을 굳게 닫아 두었다. 곁에서 나를 시중드는 시녀 도화는 몹시 초조해했다. "아씨, 도련님께 먼저 잘못을 빌고 노여움을 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창가에 앉아 네모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배현우가 찾아오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했다. 나는 배현우가 두려웠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웠고, 그를 시중드는 일도 두려웠다. 하지만 도화가 배현우의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불만을 조금도 드러낼 수 없었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가련한 꽃처럼 그저 연약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어찌 잘못을 빌겠느냐? 도련님께 연락할 방도조차 없는데." 도화는 말문이 막힌 듯 발을 구르더니 손을 홱 뿌리치고 나가 버렸다. 도화가 나가자 나는 창가에 엎드려 나무 위의 참새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리석었다. 하지만 배현우가 갓 혼례를 치렀는데 밤마다 내 처소에 드나들다 보면 언젠가는 제 부인에게 들킬 수밖에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배씨 가문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명문가의 규수와 아무런 신분도 없는 첩 중에서 누구를 택할지는 길가의 개도 알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이때 신분을 달라고 졸랐다. 배현우는 남이 먼저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내게 본때를 보여 주려면 분명 나를 냉대할 터였다. 배현우가 나를 냉대해야만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마치 하수구에 사는 쥐처럼 늘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배현우는 그런 내 처지를 모르는 듯했다. 어쩌면 정말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저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달이 흘렀다. 눈앞에 놓인 먹다 남은 음식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배현우가 찾아오지 않으니, 하인들 눈에는 내가 총애를 잃은 것으로 보였다.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첩이 총애를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인들이 나와 함께 죽을 수는 없으니, 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서둘러 챙겨 두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누구나 고달프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나는 머리카락 한 줌을 잘라 문지기에게 건넸다. 잘 싸서 배씨 가문에서 물품을 사들이는 하인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배현우가 몰래 별채로 찾아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배현우는 참지 못하고 나를 끌어안았다. "이 매정한 것아, 이렇게 오래도록 나를 찾지도 않았단 말이냐?" 나는 배현우의 품에 순순히 몸을 기댔다. "도련님께서 노하신 줄 알았습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촛불 아래 고개를 든 내 모습은 분명 아름다웠을 것이다. 배현우의 눈에 어린 황홀한 기색이 그 증거였다. 하룻밤이 지나자 나는 다시 배현우의 총애를 되찾았다. 내 의식주도 다시 예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도화는 제 손으로 내 몫을 줄여 놓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다시 나를 시중들었다. 하지만 나는 도화를 원망하지 않았다. 도화 역시 사정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집에는 병든 어머니가 계셨고, 다리를 저는 남동생과 아직 젖먹이인 조카도 있었다. 제2화 도화에게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내가 줄 수 없는 돈이었다. 그래서 정실부인이 나를 찾아왔을 때, 도화가 그녀 뒤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고 정실부인 곁의 어멈에게 뺨을 연달아 얻어맞았다. 정실부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뺨을 맞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듣자 하니 후작가의 적녀로, 이름은 심명주라고 했다. 화려한 붉은 비단옷을 입고 머리에는 온갖 보석을 장식한 심명주는 몸짓 하나하나에서도 귀티와 우아함이 흘러넘쳤다. 명주라는 이름처럼, 심명주는 집안에서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란 여인이었다.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연희라는 내 이름처럼, 나는 그저 연기 한 줄기에 불과했다. 바람이 불면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린다. 내 뺨을 스무 대나 때리고 나서야 심명주는 어멈을 멈춰 세웠다. 나를 바라보는 심명주의 눈에는 혐오와 경멸, 그리고 분노가 서려 있었다. 목숨을 건지려면 지금이라도 머리를 조아리며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어진 부인이라는 평판을 지키려고 내 목숨만은 살려 줄지도 모른다. 그럼, 그다음에는? 인신매매꾼에게 팔아넘길까? 유곽에 팔아넘길까? 심명주의 고귀한 얼굴을 바라보니, 문득 모든 게 지긋지긋해졌다. 나 같은 사람이 왜 굳이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 가야 한단 말인가? 더는 발버둥 치고 싶지 않았다. 심명주가 부채 끝으로 내 턱을 들어 올리고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배현우가 급히 달려왔다. 배현우는 막 조회를 마치고 나온 조복 차림이었다. 말에서 훌쩍 내려 마당으로 서둘러 들어오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심명주의 손을 잡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배현우의 다정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명주, 어찌 그리 화를 내시오?" 심명주는 배현우의 손을 뿌리치고 나를 가리켰다. "배현우, 저 여자는 누구이오?" 배현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심명주의 비위를 맞추며 조심스레 달랬다. "그저 내 계집종일 뿐이오. 그대가 싫다면 다시는 만나지 않겠소." 심명주가 그 말을 믿을 리 없었다. 심명주는 붉은 입술을 치켜올리며 배현우를 흘겨보았다. "그렇소? 중요하지 않다면 때려죽여도 되겠구려." 배현우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엄연히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인데 어찌 죽이라고 한다고 함부로 죽일 수 있겠소?" 심명주는 나를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주인 침상에 기어든 계집종이니, 때려죽여도 싸오." 나는 몸을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배현우가 오지 않았다면, 심명주는 나를 팔아넘기는 선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현우가 온 이상, 나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언젠가 첩을 들이는 건 받아들일 수 있어도, 배현우가 유독 아끼고 감싸 주는 여자만큼은 용납할 수 없을 테니까. 배현우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뒤에야 배현우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를 자신의 마부 조만수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배현우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볼 뿐이었다.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사내가 내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했지만,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도련님이 버린 여자를 떠맡았는데, 무엇이 그리 기쁘겠는가?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나는 계속 살아가야 했다. 나는 정신이 몽롱한 채 마부를 따라 고개를 숙여 절을 올렸다. 심명주는 여전히 못마땅해했지만, 배현우가 달랜 끝에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갈 무렵,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멀리서 배현우가 나를 한 번 돌아보는 걸 보았다. 그러고는 심명주를 따라 마차에 올라 떠났다. 나는 몸져누웠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마치 불 위에 올려져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꿈속에서 나는 아홉 살이던 해로 돌아갔다. 그해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곡식 한 톨 거두지 못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먹을 것을 찾으러 남쪽으로 떠났다. 길가의 나무는 굶주린 유민들이 껍질까지 죄다 벗겨 먹어 앙상했다. 어머니는 한 살배기 남동생을 안고, 아버지는 세 살배기 여동생을 업었다. 우리 다섯 식구도 껍질이 벗겨진 백양나무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우리 가족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남동생이 끝내 버티지 못했다. 아직 어려 나무껍질조차 먹지 못하는 아이인데, 이제 남아 있던 식량마저 바닥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밤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좁쌀 한 사발을 구해 와서는 한 줌을 내게 건네며 죽을 끓이라고 했다. 여동생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감히 묻지 못했다. 하지만 좁쌀 한 사발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좁쌀마저 바닥났다. 이번에 아버지는 노련하게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나를 데리고 유민들 틈에 있던 인신매매꾼을 찾아갔다. 제3화 그들은 언제든 달려들어 살점을 한 점 뜯어 갈 수 있는 독수리처럼 막다른 처지에 놓인 유민들을 노렸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 팔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아 봤자 먹을 것조차 없었다. 차라리 팔려 가면 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양심까지 저버린 건 아니었다. 나를 유곽에 팔지는 않고, 계집종이나 허드렛일꾼을 구해 주는 인신매매꾼에게 넘겼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제법 자라 일할 수 있었기에 좁쌀 반 자루 값은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바라봤지만, 아버지는 나를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좁쌀 반 자루를 짊어지고 떠났다. 그 무게가 몹시 무거운 듯 허리를 구부린 채 떠났다. 나는 배씨 저택에 팔려 가 부엌에서 불을 때는 계집종이 되었다. 배씨 가문은 부유한 집안이라 일이 그리 고되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밥을 먹고 목숨을 이어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돈을 조금씩 모아 훗날 몸값을 치르고 나가고 싶었다. 아니면 마님께 부탁해 장원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시집가는 것도 괜찮았다. 어쨌든 내게도 조금이나마 희망이 생겼다. 그러다 열두 살이 되던 해, 배현우를 만났다. 배현우는 무심히 나를 가리켰고, 나는 그날부터 그의 곁에서 시중드는 하급 계집종이 되었다. 배씨 가문의 적자 도련님 곁에서 일하니 먹고 쓰는 형편도 나아졌다. 덕분에 나는 새순이 돋아나는 버들가지처럼 쑥쑥 자랐다.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날, 배현우는 나를 거두어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그날부터 나는 차마 입에 올리기도 부끄럽고 남들 앞에 드러낼 수도 없는 잠자리 시중드는 계집종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귀한 도련님의 눈에 들어 팔자가 폈다며 뒤에서 수군거렸다. 천한 계집종 주제에 엄청난 행운이라도 얻은 양 말이다. 하지만 내가 과연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새장 속 새가 되기를 원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앓았다.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침상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걸을 수 있었다. 조만수는 줄곧 내 곁을 지켰다. 병에 시달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한밤중에 목이 마르면 훤칠한 그림자가 조심스레 나를 일으켜 세우고 미지근한 물을 두어 모금씩 먹여 주곤 했다. 나는 늘 열이 펄펄 끓었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곤 했다. 그럴 때마다 조만수는 내 몸을 닦아 주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나는 조만수의 거친 손을 붙잡고 어머니를 찾았다. 몇 번이고 거듭 불렀다. "어머니, 너무 아픕니다." "어머니, 저를 팔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고 나서 문득 정신이 들었다. 꿈속에서조차 이러면 안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만수는 내가 여전히 정신이 흐린 줄로만 알았다. 그는 어수룩하게 내 말에 대답했다. "안 판다. 그대를 안 팔 것이오." 내 눈물과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뒤섞였지만, 조만수는 그것들을 말끔히 닦아 주었다. 천한 목숨이라 그런지 질기기도 하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나 보다. 나는 그렇게 조만수의 보살핌으로 살아남았다. 나 때문에 조만수는 마부 일을 잃었다. 심명주는 그를 장원으로 내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배현우가 또 하인들의 거처로 나를 찾아올까 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배현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고, 나름의 자존심도 있었다. 나는 이미 하인의 여인이 되었으니, 다시는 나를 돌아보지 않을 거다. 나는 조만수의 초가집 앞에 앉아 있었다. 눈부시게 따스한 햇살이 마음속에 드리운 그늘마저 녹여 주는 듯했다.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조만수는 내가 밖에 앉아 있는 걸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다. 장원 사람들이 나를 보면 조만수를 비웃을 테니까 집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됐다. 나는 조만수가 다가와 날 꾸짖기를 기다렸다. 어쩌면 매질할지도 모른다. 내가 친정에 있을 때, 사내들은 다들 그런 식으로 제 마누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조만수는 그저 내게 다가와 몸을 부축해 주었다. "왜 일어났소? 의원이 쉬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나는 멍하니 조만수를 바라보았다. 조만수는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사내였으며, 허벅지는 내 허리보다 굵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색하게 내 이마를 짚어 보더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며 재촉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걷지 못하는 줄 알았는지, 조만수는 나를 번쩍 안아 집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침상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밖으로 나가 밥을 하기 시작했다. 조만수는 음식을 내 밥그릇에 절반 넘게 덜어 주었다. 좋은 음식은 아니었다. 배씨 저택에서 먹던 남은 음식보다도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한 입 한 입 귀하게 여기며 먹었다. 밤이 되자 나는 옷을 벗고 조만수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조만수는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 듯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허둥지둥 나를 밀어냈다. 조만수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당연했다. 나는 너무 더러운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습니다." 제4화 조만수의 얼굴에 번졌던 홍조가 서서히 가셨다. 그는 내게 이불을 덮어 준 뒤, 바닥에 잠자리를 깔고 누웠다. "난 여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내게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오." "앞으로는 둘이 의지하며 살아가오. 그대가 나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면, 병이 다 나은 뒤에 의남매를 맺으면 되오. 그다음엔 내가 좋은 혼처를 찾아 주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가 나와 혼인하지 않더라도 내가 책임지고 먹여 살리겠소." "내게 먹을 것이 있으면 그대도 굶게 두지는 않겠소." 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귀뚜라미가 울고, 밤공기는 물처럼 차가웠다. 꼭 지난해 가을밤 같았다. 내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인하고 싶습니다." 조만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잠들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가장 마음 편히 잠든 밤이었다. 큰 병을 앓고 겨우 회복한 터라 나는 농사일을 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집 안을 정리하고 밥하며 마당에 채소밭도 일구었다. 한가할 때면 조만수에게 바늘과 실, 자투리 천을 사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나는 수를 놓을 줄 알았다. 수놓은 물건을 하나씩 팔면 동전 몇 닢이라도 벌 수 있었고, 그 돈으로 살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 몸이 좀 더 회복된 뒤에도 조만수는 내가 밭에 나가 일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밖에서 온갖 험담을 듣게 될까 봐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더 모진 말도 몇 년이나 듣고 살아왔다. 그러나 조만수는 남들의 험담을 신경 썼다. 그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고, 나도 굳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수놓은 물건은 제법 잘 팔렸다. 덕분에 농사일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조금 달랠 수 있었다. 그렇게 조만수와 나는 한집에서 살림을 꾸려 나갔다. 처음에는 조만수는 계속 바닥에서 잤다. 내가 침상으로 올라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나도 이불을 들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는 내가 추위에 병이라도 날까 봐 깜짝 놀라더니, 할 수 없이 내 말을 듣고 침상에 올라와 잤다. 조만수는 꼼짝도 하지 않고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조만수가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그리 우습소?" 나는 조만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귓가까지 울렸다. "그저 기뻐서 그렇습니다." 조만수는 내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 안전을 내세워 조만수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내가 추위에 떨지는 않을지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그는 자신 나를 더 걱정해 주는 게 기뻤다. 나는 배현우와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 년 뒤, 수놓은 물건을 팔고 돌아왔을 때였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조만수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배현우는 내 속옷을 손에 든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듯 온몸이 싸늘해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단 한 생각만 들었다. '도망쳐!'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도망치면 조만수는 어떻게 되는가? 배현우도 나를 발견했다. 그는 고양이나 강아지를 부르듯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나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배현우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작년보다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조만수 곁을 지날 때, 조만수의 몸이 움찔하는 걸 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배현우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나를 거칠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는 손으로 내 허리를 어루만졌다. "연희야, 나와 같이 돌아가자." 애써 참고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배현우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저는 이미 혼인했습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차가운 눈길로 조만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상관없다." 그는 나를 끌어당겨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수치심이 조만수 앞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견디려 했다. 그러나 배현우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누르며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하더니, 다른 사람이 보는 앞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고 몸을 기울여 입을 맞췄다. 나는 배현우를 밀어냈다. 이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조만수 앞에서만큼은 이러지 말았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