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번째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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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보스인 로렌초 코르시카와 나의 결혼은 언제나 마지막에 어그러졌다. 약혼한 지 5년, 결혼식만 무려 32번을 올렸지만, 매번 식이 진행되는 도중 사고가 터지며 파행으로 끝이 났다. 33번째 결혼식에서는 식이 한창 진행되던 중 성당 외벽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고, 나는 그 아래 깔려서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두개골 골절에 중증 뇌진탕, 상태가 심각하다며 병원에서 날아온 통지서만 10장이 넘었다. 나는 두 달 동안 생사의 경계를 헤맨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퇴원하던 날, 로렌초와 측근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보스, 정말 그 고학생을 사랑하신다면, 키아라 아가씨와 그냥 파혼하시면 되잖아요.” “코르시카 집안의 힘이면 어떤 뒷말도 잠재울 수 있는데, 왜 번번이 사고를 만드시는 건가요?”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요.” 로렌초의 측근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로렌초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10년 전, 모르토 님과 아내분이 함께 목숨을 바쳐서 나를 살려주셨어. 그 은혜는 결혼으로 갚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는 소피아를 사랑해. 소피아 말고는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 나는 온몸에 어지럽게 남은 흉터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울었다. 내가 견뎌 온 모든 고통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치밀하게 꾸며 낸 일이었다. 그러니 로렌초가 선택하지 못한다면, 내가 대신 이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Chapters (1)

第1章

마피아 보스인 로렌초 코르시카와 나의 결혼은 언제나 마지막에 어그러졌다. 약혼한 지 5년, 결혼식만 무려 32번을 올렸지만, 매번 식이 진행되는 도중 사고가 터지며 파행으로 끝이 났다. 33번째 결혼식에서는 식이 한창 진행되던 중 성당 외벽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고, 나는 그 아래 깔려서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두개골 골절에 중증 뇌진탕, 상태가 심각하다며 병원에서 날아온 통지서만 10장이 넘었다. 나는 두 달 동안 생사의 경계를 헤맨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퇴원하던 날, 로렌초와 측근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보스, 정말 그 고학생을 사랑하신다면, 키아라 아가씨와 그냥 파혼하시면 되잖아요.” “코르시카 집안의 힘이면 어떤 뒷말도 잠재울 수 있는데, 왜 번번이 사고를 만드시는 건가요?”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요.” 로렌초의 측근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로렌초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10년 전, 모르토 님과 아내분이 함께 목숨을 바쳐서 나를 살려주셨어. 그 은혜는 결혼으로 갚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는 소피아를 사랑해. 소피아 말고는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 나는 온몸에 어지럽게 남은 흉터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울었다. 내가 견뎌 온 모든 고통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치밀하게 꾸며 낸 일이었다. 그러니 로렌초가 선택하지 못한다면, 내가 대신 이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제1화 “파혼을 하겠다고?” 로렌초의 어머니이자 코르시카 집안의 안주인인 엘리사는 깜짝 놀랐다. 엘리사는 이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로렌초를 얼마나 깊이 사랑해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키아라, 다시 생각해 보렴. 결혼만 하면 너는 코르시카 집안의 차기 안주인이야. 절대로 네가 서운할 일은 없게 해 줄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로렌초와 로렌초의 측근이 나눈 대화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엘리사는 하려던 말을 목구멍에서 삼켰고,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5년 동안 33번이나 그랬어요. 성당에 갈 때마다 사고가 났죠. 그 모든 사고를 파혼하게 만들려고 로렌초가 직접 꾸민 거예요.” 나는 의료 기록과 상태가 심각하다며 병원에서 날아온 통지서 뭉치를 꺼내서 탁자 위에 담담하게 내려놓았다. “로렌초는 결혼이 자신을 옭아맨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저도 억지로 붙잡을 생각은 없어요. 파혼하는 게 제게도, 로렌초에게도 좋은 일이에요.” 엘리사는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엘리사는 이 몇 년 동안 내가 결혼식을 올릴 때마다 겪었던 온갖 사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첫 번째에는 성당 앞에서 우리 차량 행렬이 저격수의 습격을 받았었다. 나는 총을 네 발이나 맞았고, 차가운 돌계단 위에서 죽을 뻔했다. 두 번째에는 통제력을 잃은 화물차가 내가 탄 차를 들이받아서 오른손 손바닥뼈가 분쇄 골절되었다. 세 번째에는 출발 전에 예약해 둔 호텔에서 폭발이 일어나, 나는 3시간 동안 불길 속에 갇혀 있었다. 엘리사는 충격과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팔에 남은 흉한 흉터를 쓸어내리더니,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너를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로렌초가 은인의 딸을 이렇게 대했구나.” “우리 코르시카 집안이 너를 저버렸어. 모르토 집안의 은혜도 저버렸고.”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울음을 애써 삼켰다. 코르시카 저택의 육중한 대문을 나서자, 로렌초의 검은 마이바흐가 눈앞에 나타났다. 차창이 내려가며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 보였다.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로렌초가 비꼬듯 말했다. “또 일러바치러 갔어? 그렇게 우리 집안에 들어오고 싶으면 지금 당장 성당에 가서 서약서에 사인하자.” 나는 말없이 그저 조수석을 흘끗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곳에는 소피아 카모라가 앉아 있었다. 눈시울을 붉힌 채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인 듯한 모습이었다. 로렌초가 사인이라는 말을 꺼내자 소피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에서 내린 로렌초가 소피아를 향한 내 시선을 가로막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인정할게. 소피아에게 마음이 생겼어. 그래도 걱정하지 마. 너에게 해야 할 책임은 다할 거야. 그러니까 결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책임... 그 두 글자가 독을 바른 비수처럼 가슴 깊숙이 박혔다. 곧 나는 속으로 차갑게 비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은 일이 있으니까 다음에 하자. 어차피 5년이나 끌었는데 며칠 더 미룬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로렌초의 눈에 순간적으로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상처가 조금만 아물어도 가장 먼저 로렌초에게 성당에 가자고 재촉했었다. 나는 로렌초의 의아한 표정을 신경 쓰지 않고 돌아서서 곧바로 떠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차에서 내린 소피아가 내 팔을 붙잡더니 입을 열었다. “로렌초는 약속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좋은 사람이에요. 저도 그동안 로렌초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결혼하고 나시면 로렌초에게 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말투는 애처로웠지만 눈빛에는 질투가 가득했다. 소피아의 손톱이 내 살을 세게 파고들자, 아픈 나머지 억지로 소피아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소피아는 갑자기 몸을 뒤로 젖히며, 그 틈을 타서 자기 뺨을 세게 후려쳤다. 로렌초의 눈에는 내가 소피아를 때린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로렌초는 소피아를 품에 감싸안으면서 붉게 부어오른 뺨을 다급하게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남자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입으로는 급하지 않다면서, 돌아서자마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거야?” 로렌초가 소피아를 데리고 떠나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키아라, 돌아가신 네 부모님이 지금 네 모습을 보신다면 분명 실망하셨을 거야.” 해명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억지로 다시 삼켰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차가 지나가며 일으킨 흙먼지에 시야가 흐려졌다. 이윽고 휴대폰 알림음이 울리자 나는 비로소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키아라 아가씨, 2차 뇌 CT 결과가 나왔어요. 결과가 좋지 않으니 가능한 한 빨리 병원으로 와 주세요.] 제2화 주치의 진료실을 나서면서 나는 손에 든 진단서를 내려다보았다. 뇌암 3기라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바로 입원해서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는다면, 그래도 희망은 있을 거예요.” 의사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10년 전, 코르시카 보스를 노린 연쇄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아직 소년이었던 로렌초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목숨을 잃었다. 모르토 집안 역시 이와 동시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했다. 내가 살아남아 코르시카 집안에 거둬질 수 있었던 것도, 엘리사 여사가 ‘피에는 피로, 목숨에는 목숨으로’라는 마피아의 신조를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모아 둔 돈으로는 수술비는 물론이고 이후의 치료비까지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로렌초의 회사로 가기로 했다. 로렌초의 사무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소피아는 안에서 책상 위에 놓인 보라색 아이리스 화분을 만지고 있었다. 로렌초는 그런 여자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들어서려다가 걸음을 잠시 멈췄다. 오랫동안 로렌초와 함께했기에 로렌초가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피아가 준 것이라면 자신의 취향까지 바꿀 수 있는 모양이었다. 로렌초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발견했다. 몸을 살짝 곧추세우던 순간, 온화하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나중에 갚을게.” 나는 살고 싶었기에 딱히 용건을 숨기지 않았다. “키아라 씨,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줄곧 로렌초 집에서 지내셨다고 들었어요. 먹고 입고 쓰는 것까지 전부 그 집 돈으로 해결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이제 와서 돈까지 빌리겠다는 건 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 설마 로렌초와 결혼하는 것도 돈을 노리고 그러는 건가요?” 소피아의 말투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피아의 말을 무시한 채 로렌초만 똑바로 바라보았다. 로렌초는 일부러 내 시선을 피하더니 목소리도 서서히 차가워졌다. “소피아 말이 맞아. 돈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해결해. 결혼만 하면 네 부모님에게 진 빚도 그걸로 완전히 갚는 거야.” 꽉 움켜쥐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고, 로렌초의 태도에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책상 아래에서는 로렌초와 소피아의 두 손이 꼭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로렌초의 손가락에는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남긴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결혼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로렌초의 표정에 순간 의아함이 스쳤지만 곧 내 말뜻을 알아차린 듯했다. “너는 그 일로 나를 협박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네 부모님이 내 목숨을 구해 줬다고 해서, 내가 꼭 너한테 뭘 빚지기라도 했다는 거야?” 로렌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경호원에게 나를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마치 나를 일부러 자극하려는 듯이. 내가 경호원들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로렌초는 돌아서서 비서에게 소피아를 위해 160억짜리 호화로운 요트를 사 주라고 지시했다. 160억이면 내 치료비 전부를 감당하고도 남을 돈이었다. 그러자 나는 허탈했는지 씁쓸한 웃음이 터졌고 눈앞은 눈물로 흐려졌다. ‘그래도 괜찮아. 적어도 이제 나와 로렌초 둘 다 자유로워졌으니까.’ 제3화 한 달 가까이 로렌초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든 시간을 소피아에게 쏟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글 하나 올리지 않던 로렌초의 SNS 계정에 소피아와 함께한 피드가 자주 올라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평범한 연인처럼 오페라를 보러 갔고, 프라이빗한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로렌초가 예전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하나씩 함께했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게시물에는 로렌초가 맞춤 정장을 입고, 소피아와 웨딩 사진을 찍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게시물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한 번쯤 보고 싶었거든.] 나는 자조하듯 웃으며 좋아요를 누르고는 휴대폰을 껐다. 다음 날, 로렌초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에는 마지못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키아라, 서류 챙겨서 한 시간 뒤에 성당으로 와.] 로렌초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5년 동안 로렌초가 먼저 성당에 가자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절 문자를 쓰려던 순간, 아버지가 남긴 반지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떠나기 전에 적어도 그 반지만큼은 되찾아야 해.’ 나는 오래된 성당으로 향했다. 익숙한 거리였고 5년 동안 수없이 오갔던 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드물게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탄흔이 가득한 돌기둥 아래에서 로렌초를 한 시간 동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로렌초의 모습이 보였다.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고,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도 전보다 훨씬 강했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나는 알고 있었다. 로렌초는 극도로 힘들 때만 담배를 피웠다. 한 달 만에 나를 본 로렌초는 잠시 멈칫했다. “너 왜 이렇게 됐어?” 병마에 끊임없이 시달린 고통과 항암 치료의 부작용 때문에, 한 달 사이에 나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로렌초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금의 내가 틀림없이 아주 흉해 보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로렌초는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렸다. “오늘이 우리 사인하고 부부가 되는 날인데, 꼭 이런 모습으로 기념사진을 찍어야겠어?” “나는 서약하러 온 게 아니야. 아버지 반지를 돌려받으러 왔어.” 나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며 로렌초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렌초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내가 또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로렌초는 곧바로 코웃음을 치더니 내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내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성당 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내 앞에서 이런 밀당을 할 필요 없어.” “내가 결국 이 은혜에 굴복해서 너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좋아. 네가 이겼다고 인정할게. 들어가서 이거 끝내고, 날짜 잡아서 결혼식까지 하자.” 로렌초는 거의 자포자기한 듯이 말했다. 성당 안의 신부는 우리를 보자 익숙한 솜씨로 서약에 필요한 서류와 증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두 분 신분 서류를 보여 주시고, 혼인 신청서에 사인해 주세요.” 로렌초가 집안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꺼냈다. 반지를 건네려는 순간, 소맷단이 살짝 밀려 올라가면서 손목 안쪽에 새로 새긴 문신이 드러났다. 소피아 이름의 이니셜이었고, 그 위로 붉은 장미 한 송이가 감겨 있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신부는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으시네요. 이름까지 몸에 새기셨다니 한눈에 봐도 정말 행복해 보여요.” 그 말에 로렌초가 잠시 움찔하더니 어색한 손길로 소맷단을 다시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여전히 아무런 반응 없이 서 있자 로렌초는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왜? 이번에도 오는 길에 사고가 날까 봐 서류를 안 챙겨 온 거야?”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말했잖아. 나 결혼하러 온 거 아니야. 반지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렌초의 휴대폰이 날카롭게 울렸다.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 로렌초의 부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보스! 큰일 났어요! 소피아 아가씨가 별장에서 수면제를 잔뜩 삼켰어요.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아요.] [그리고 유서를 발견했는데, 거기에 키아라 아가씨가 자신을 몰아붙였다고 적혀 있어요!] 제4화 부하의 말이 끝나자 로렌초가 벌떡 일어섰다. 로렌초의 이성은 순간 뚝 하고 끊어졌고 얼굴에는 공포만이 남았다. “키아라! 네가 감히!” 로렌초는 이를 악문 채 나를 노려보았다. 오랫동안 로렌초를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평정심을 잃은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로렌초는 내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뒤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지시해서 나를 거칠게 차에 끌어 태우고 소피아의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별장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소피아와 로렌초가 함께 찍은 사진은 모조리 바닥에 깨져 있었고, 소피아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숨도 거의 쉬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로렌초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며 소피아에게 달려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소피아의 차가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소피아! 나를 봐! 나 결혼 안 해! 그러니까 눈 좀 떠서 나를 봐!” 소피아의 손 옆에는 뜯어 놓은 수면제와 피가 묻은 유서가 놓여 있었다. 유서에는 자살한 이유를 전부 내 탓으로 돌리는 내용과 함께, 나에 대한 원망과 비난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로렌초의 동공이 분노로 흔들리더니 이내 몸을 홱 돌려 커다란 손으로 내 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약병 안에 수면제가 아직 절반 넘게 남아 있었고, 소피아가 실제로 먹은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로렌초는 미쳐서 날뛰는 짐승처럼 나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키아라!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나랑 결혼하고 싶다며! 내가 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소피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소피아가 무슨 잘못을 했어?” 증오로 가득한 그 눈빛이 얼음송곳처럼 내 심장을 꿰뚫었다. 로렌초는 처음부터 나를 믿은 적이 없었다. “나는 자살하라고 한 적 없어. 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 로렌초 너를 따라간 건 아버지의 반지를 되찾으려던 것뿐이야.” 나는 깨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고 점점 숨이 막혀왔다. 솔직히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로렌초는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곧 로렌초가 내 목에서 손을 놓더니 짝하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이내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휩쓸었다. 로렌초가 있는 힘을 다해 내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로렌초는 두 눈에 핏발이 가득 선 채 자신의 손에 끼고 있던 그 반지를 거칠게 빼냈다. 그러고 내 앞에서 그 반지를 내팽겨쳤다. 반지는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품이 허망하게 부서진 것이었다. 발밑에 흩어진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내 입술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네가 원한다면 돌려줄게.” “10년 전에 내가 네 부모님이 날 구해 주길 바랐던 것 같아? 그때 내 결혼과 자유로 갚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면, 차라리 그 암살 사건에서 죽는 게 나았어!” “네 부모님의 죽음은 두 분이 스스로 선택한 거야! 그런데 왜 내가 평생 그 족쇄를 차고 살아가야 하는데!” 로렌초의 말에는 10년 동안 쌓여 온 증오와 원망이 가득했다. 소피아의 자살 소동이 로렌초의 이성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로렌초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곧 로렌초는 바닥에 떨어진 수면제 병을 집어 들었다. 로렌초가 눈짓하자, 곁에 있던 경호원이 내 무릎 뒤를 세게 걷어찼다. 이내 나는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로렌초! 미쳤어?” 로렌초는 내 턱을 움켜잡고 병 안에 남아 있던 수면제를 전부 내 목구멍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알약이 목구멍을 긁어 대며 극심한 통증과 질식감을 일으켰다. “소피아가 약을 삼킬 때는 틀림없이 이것보다 더 괴로웠을 거야. 너도 직접 경험해봐!” 나는 알약을 토해 내려고 했지만, 경호원이 입을 틀어막고 억지로 삼키게 했다. 질식할 듯한 고통이 몰려왔고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완전히 어둠에 잠기기 전, 로렌초가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차갑고 단호한 결심만이 남아 있었다. “키아라, 어머니에게 우리 파혼할 거라고 할 거야. 이건 내가 잘못한 거야. 처음부터 소피아를 선택해야 했어.”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로렌초와 소피아는 떠나면서 나를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카펫 위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몸을 떨었고, 끝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로렌초는 억지로 약혼을 지키려 했던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이미 로렌초를 대신해서 그 선택을 내려 두었다. [로렌초 시점] “보스, 환자는 안정적이에요. 복용량이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라서 곧 깨어날 거고요.” 주치의의 확인을 듣고서야 로렌초는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은 조금 전까지 휩쓸렸던 공포와 분노 때문에 여전히 윙윙 울리고 있었다. 일이 너무 빠르게 벌어졌다. 생기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소피아를 본 순간, 로렌초는 정말로 두려움에 휩싸였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로렌초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수면제를 똑같이 들이부은 키아라가 갑자기 떠오르자, 강한 후회가 순식간에 로렌초를 집어삼켰다. 조금 전까지 로렌초의 마음은 소피아에게 쏠려 있었다. 그 때문에 키아라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렌초가 급히 뒤에 있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키아라는? 병원으로 보냈어? 당장 의사 불러서 위세척하게 해! 이 일은 여기서 끝이야!” 부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보스, 그때 키아라 아가씨를 병원으로 보내라는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래서 저희는, 저희는 보스의 명령대로 그곳에 두고 왔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