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章
의사는 내가 새로 개발된 치료를 받지 못하면 72시간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단 한 번뿐인 치료 기회를 유성진은 신유나에게 줘버렸다.
“유나의 신부전이 더 심하잖아.”
유성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죽음을 앞당기는 흰 알약을 삼켰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많은 일을 했다.
서류에 사인할 때 변호사는 손을 덜덜 떨며 물었다.
“4000억이나 되는 지분을 정말 전부 넘기시려고요?”
“네. 신유나 씨에게 넘길게요.”
내 딸 유다인은 신유나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모가 새 원피스를 사 줬어요!”
“정말 예쁘네. 앞으로는 유나 엄마 말 잘 들어.”
내가 직접 세운 갤러리에는 이제 신유나의 이름이 걸리게 될 것이었다.
“언닌 정말 너무 좋은 사람이야.”
신유나가 울면서 말하자 나는 대답했다.
“네가 나보다 더 잘 운영할 거잖아.”
부모님이 남긴 신탁 기금도 사인 한 번으로 아주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러자 유성진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은채야, 너 진짜 많이 달라졌구나. 더는 예전처럼 사람을 몰아붙이지 않아. 이런 네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그렇게 나는 죽음을 앞두고 마침내 저 사람들 눈에 완벽한 신은채가 되었다.
순종하고 아낌없이 내주면서, 비로소 더 이상 따지지 않는 신은채가 된 것이었다.
72시간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됐다. 나는 내 심장이 멈춘 그 순간, 저 사람들이 나를 뭐로 기억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드디어 내려놓는 법을 알게 된 좋은 아내일까?
아니면 죽음으로 복수를 완성한 여자일까?
제1화
남편은 내가 충분히 다정하지 않다고 하고, 부모님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하며, 딸은 유나 엄마가 더 좋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72시간 동안 내 목숨과 내 모든 것을 완벽한 신유나에게 내어 주기로 했다.
의사의 말이 귓가에서 계속 윙윙거리며 울렸다.
“암 말기세요. 지금 당장 특수 치료를 받지 않으면 길어야 3일이고요.”
나는 병실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신유나가 나타나기 전까지, 나는 유성진의 아내로 7년 동안 이 결혼을 애써 지켜 왔다.
“괜찮아?”
문이 열리고 남편 유성진이 들어왔는데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다.
“괜찮아.”
내가 나직하게 대답하자 유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의사 선생님이 말하시길 너 그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런데 유나가 더 필요하다는 거지?”
난 유성진 대신 그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자, 곧 나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신유나, 12살 때 내가 부모님을 설득해서 보육원에서 데려온 불쌍한 아이였다.
친동생처럼 아꼈던 신유나가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은채야, 네가 이해해 줘.”
유성진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유나 상태가 더 심해. 신장이 거의 다 망가졌다고 했어. 그런데 너는... 너는 아직 괜찮아 보이잖아.”
확실히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을 것이었다.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치명적인 용량의 진통제를 계속 복용하며, 암으로 인한 극심한 통증을 애써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
나는 평온하게 말했다.
“치료 기회는 유나에게 줘.”
유성진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네가 이해해 줄 줄 알았어. 이 몇 년 사이에 너도 많이 달라졌어. 예전처럼 고집스럽지도 않고.”
‘고집스럽다니.’
나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신유나가 나타난 뒤로 내가 무언가를 끝까지 주장하기만 하면, 늘 질투심에 휩싸이거나 속이 좁은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나는 간신히 정신줄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그러나 딸은 나를 보자마자 곧장 신유나 뒤로 숨었다.
“다인아.”
씁쓸한 마음에 나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언니, 왔어?”
신유나는 내가 선물한 명품 하이엔드 정장을 입고서 원래 내 자리였던 곳에 앉아 있었다.
“유나야, 줄 게 있어.”
나는 서재로 가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내 명의로 된 그 갤러리 양도서야. 너한테 주고 싶어서 그래.”
“뭐라고?”
신유나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그건 언니가 제일 아끼는 갤러리잖아!”
그 갤러리는 확실히 신유나가 말한 것처럼 내가 직접 세운 갤러리였다.
내 피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었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네가 나보다 더 잘 운영할 거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결혼 선물 미리 주는 셈으로 생각하고 받아.”
신유나의 안색이 순간 미묘하게 변했지만, 금세 순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언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신유나에게 다가서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도 다 알고 있어. 괜찮아. 두 사람 축복할게.”
그때 유성진이 들어왔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유성진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더니 경계심이 어린 말투로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빠, 언니가 갤러리를 나한테 준대.”
신유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언니는 정말 너무 좋은 사람이야.”
그 말을 들은 유성진은 꽤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은채야, 너...”
“나 피곤해.”
나는 유성진의 말을 끊었다.
“먼저 올라가서 쉴게. 다인아, 이모 말 잘 들어.”
“네.”
딸은 담담하게 대답하더니 고개를 돌려 신유나에게 말했다.
“이모, 우리 게임 계속해요.”
‘하, 이모라...’
친엄마보다 이모를 더 좋아하는 딸의 말에 내 심장은 순간 쥐어짜는 듯이 아팠다.
어찌저찌 침실로 돌아와 문을 닫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암세포는 미친 듯이 날 갉아먹고 있었고, 약들은 내 몸을 더욱 빠르게 망가뜨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옷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값비싼 드레스, 주얼리들과 가방들은 머지않아 모두 신유나의 것이 될 것이었다.
“72시간 남았어.”
나는 거울 속 창백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은채, 마지막 3일 동안 저 사람들한테 완벽한 인상을 남겨 주자.”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었다.
또한 난 내가 죽은 뒤의 일들을 차근차근 준비해 두었다.
내가 모아 둔 자료를 풀어 신유나의 진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만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모두 다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물론 그때가 되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지만, 이게 내가 오랫동안 바라던 나의 복수였다.
제2화
이튿날 새벽, 나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 깨어났다.
암세포가 전신을 꽉꽉 채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진통제 덕분에 그나마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윽고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켰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많아.’
계단을 내려가는데 거실에서 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딸은 신유나의 무릎에 앉아서 함께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이모, 이 공주 너무 예뻐요!”
딸이 신이 나서 책장을 가리켰다.
“그렇네. 우리 다인이처럼 예쁘네?”
신유나는 다정하게 유다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유다인은 나를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내가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잘 잤어, 다인아?”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다가갔다.
“네.”
딸은 건성으로 대답한 뒤 신유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모, 우리 정원에 나비 보러 가요.”
“잠깐만, 다인아.”
신유나가 걱정하는 척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안 듣고 싶어요.”
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는 늘 바쁘고 나랑 놀아 주지도 않잖아요.”
그 말에 가슴이 칼에 베이는 듯 아팠다.
확실히 지난 몇 년 동안 회사 일 때문에 나는 딸과 함께한 시간이 확실히 적었다.
반면 신유나는 늘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줬다.
“괜찮아. 둘이 놀다 와.”
나는 간신히 웃으며 말했다.
손을 잡고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벽을 짚고서야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몸이 아파서도 있겠지만 희한하게 가슴을 찌르는 듯이 아파왔다.
다이닝룸에서는 경제 뉴스를 보고 있던 유성진은 내가 들어가자 고개만 들어 한 번 흘끗 바라보고 물었다.
“안색이 많이 안 좋네?”
유성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억지로 버티지 마.”
“괜찮아.”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얘기 좀 하고 싶어.”
“무슨 일이야?”
유성진이 귀찮다는 듯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우리 혼전 계약서 말이야.”
나는 준비해 둔 서류를 꺼냈다.
“좀 고치고 싶어.”
유성진이 서류를 받아 읽더니 눈을 들었다.
“너 재산 분할 청구권을 전부 포기하겠다는 거야?”
“어.”
나는 평온하게 말했다.
“만약에 나한테...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잖아? 그러면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이 당신이 가지길 바라. 부모님이 나한테 남긴 신탁 기금까지 말이야.”
“아, 내가 소장한 미술품도 다 유나에게 줄 거야.”
“뭐라고?”
유성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장모님이 너에게 준 그 모네 진품까지 유나에게 준다고?”
“유나는 예술을 좋아하니까 나보다 더 잘 다룰 거야.”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결혼 선물 미리 주는 셈이라고 생각해.”
그러자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유성진은 얼굴이 굳어진 채 차갑게 나를 바라보았다.
“신은채,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해.”
나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냥 지쳤어. 다 내려놓고 싶어.”
“알고 있었어?”
유성진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호텔 감시 영상, 카드 명세서, 그리고 다인이 유나를 유난히 싸고도는 것까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넌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야?”
이에 유성진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난 널 원망하지 않아.”
“내가 부족했어. 늘 회사 일로 너랑 다투고 강하게 나갔으니까.”
“근데 신유나는 다정하고 살갑잖아. 네 말에도 반박하지 않고. 그러니까 너한텐 유나가 더 잘 맞았겠지.”
“은채야!”
“오후에 회사에 가서 회사 지분을 유나에게 넘긴다고 발표할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되면 유나가 정식으로 이사회에 들어가게 되겠지.”
“너 미쳤어?”
유성진이 벌떡 일어섰다.
“무려 4000억이나 되는 지분이야!”
“안 미쳤어.”
나는 정원에 있는 유나와 딸의 모습을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그냥 다들 잘 살기를 바라는 거야.”
제3화
오후, 그룹 본사.
소식은 금세 퍼졌다.
동생을 데리고 이사회에 참석한 신은채가 그 자리에서 지분 양도를 발표했다는 이야기였다.
“관장님, 지금 농담하시는 건가요?”
오랜 이사인 노현철 이사가 따로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사님, 저 진심이에요.”
나는 서류에 내 이름을 적었다.
“오늘부터 신유나 씨가 저를 대신해 회사 의사 결정에 참여할 거예요.”
유나는 흥분으로 온몸을 떨면서도 애써 겸손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서류를 신유나에게 건네면서 건조하게 한마디만 했다.
“잘해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유나는 드디어 가면을 벗어 던지고 진솔하게 물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네가 원한 거잖아. 아니야?”
나는 차창에 몸을 기댔다.
“내 남편, 내 딸, 내 재산까지. 유나야, 네가 이겼어.”
“언니, 나는...”
“한 가지만 약속해.”
나는 신유나의 말을 끊었다.
“적어도 내 딸 앞에서는 계속 연기한다고. 걔는 아직 어려. 완전한 가정이 필요해.”
저녁에 나는 혼자 서재에서 물건을 정리했다.
이때 진영숙 간호사가 들어와서 내 모습을 보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사모님.”
“이거 다 처리해 주세요.”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가리켰다. 그건 바로 신유나의 범죄 증거였다.
“다 태워요.”
“그래도 사모님, 이게 있으면 저희가...”
“다인이는 엄마가 필요해요.”
나는 눈물을 닦았다.
“그 사람이 제가 아니더라도 말이죠.”
마지막 날 아침, 나는 거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암세포는 이미 온몸으로 퍼져서,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칼날 위를 구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윽고 난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귀신처럼 창백한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야윈 데다가 두 눈두덩은 움푹 꺼져 있었다.
“24시간 남았어. 버텨야 해.”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스스로 세뇌했다.
오늘은 유성진과 신유나의 약혼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더 이상 기다리긴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은 이미 새롭게 꾸며져 있었다. 신유나는 샴페인 색 드레스를 입고 도우미들에게 꽃을 어디에 놓을지 지시하고 있었다.
“은채야.”
뒤돌아보니 부모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두 분 모두 한껏 차려입고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사파이어 목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원래 내게 물려줄 예정이었던 목걸이였다.
“은채야, 정말 잘했어.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그동안 네가 늘 유나와 싸워서 나랑 네 아빠가 얼마나 골치 아팠는지 몰라.”
엄마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어릴 때부터 얌전하고 철이 들었어. 너처럼 늘 그렇게 강하게 나서지도 않았지. 이제야 언니답게 구는구나.”
기뻐하는 두 분의 표정을 바라보자, 내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아무리 잘해도 두 분의 눈에는 얌전한 신유나가 늘 나보다 나았다.
그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홱 몸을 돌렸다.
파티는 저녁 7시에 시작됐다.
파티장엔 모두 뉴욕 상류 사회 사람으로 손님들이 붐볐다.
예상한 대로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하나같이 놀랐다.
남편과 다른 여자의 약혼 파티에 직접 참석하려면 대체 얼마나 큰 배포가 필요할까 생각하며, 괜히 한 번 더 힐끔거리는 것 같았다.
“은채야, 정말 왔네?”
이때 유성진이 다가왔다. 잘생긴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걸려 있었다.
“온다고 했잖아.”
나는 샴페인 잔을 들었다.
“축하해.”
“은채야.”
유성진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 신유나가 유성진의 팔짱을 끼면서 내게 다가왔다.
“언니, 와 줘서 고마워.”
달콤하게 웃는 신유나의 왼손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였다.
유씨 집안의 가보이자 원래는 내 반지이기도 했다.
“이곳에 오신 모든 귀빈 여러분.”
유성진이 잔을 들어 올렸다.
“저와 유나의 약혼 파티에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특히... 은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이해해 주고 축복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요.”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고, 나는 잔을 들어 멀리서 가볍게 답례했다.
“저도 언니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신유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언니는 제게 모든 걸 줬어요. 가족도, 사랑도,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까지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무대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려고 했다.
그러나 두 눈으로 직접 그런 모습을 보게 되자,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제4화
“엄마.”
고개를 숙이자 딸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꼭 예쁜 공주님 같았다.
“유나 엄마가 알려 주라고 했어요.”
예쁜 외모와 달리 딸의 말투는 마치 낯선 사람에게 말하는 듯 데면데면했다.
“이제 케이크 자른대요.”
“알려 줘서 고마워.”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지만, 딸은 곧바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나 엄마는 엄마가 분위기 망치지 말고 좀 멀리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다섯 살 난 내 딸이 다른 여자가 품고 있는 나에 대한 악의를 그대로 전하자, 가슴이 칼에 베이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인아.”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엄마가 너한테 할 말이...”
“듣기 싫어요!”
내 말을 끊은 딸의 작은 얼굴에는 짜증과 귀찮음이 가득했다.
“엄마는 맨날 유나 엄마 기분만 나쁘게 하잖아요! 엄마 싫어요!”
말을 끝낸 딸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신유나에게 달려갔다.
“유나 엄마!”
“참 딱하기도 하지.”
옆에서 누군가 작게 수군거렸다.
“친딸도 친엄마한테 정이 없네.”
“일만 하느라 그렇지. 그러니 신유나가 얼마나 좋겠어? 늘 아이랑 같이 있어 주잖아.”
내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이 가늘게 떨렸다.
남들의 수군거림 때문이 아니라, 내 딸이 내뱉은 엄마가 싫다는 말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꼬박 열 달을 품고 낳은 내 딸이 나를 싫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마치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이 모든 장면을 바라보는 제3자처럼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내 남편, 내 딸, 내 가족...
모두 신유나를 중심을 에워싸고 있었고 오히려 내가 불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말 감동적이구나.”
엄마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봐라. 다인이 유나를 얼마나 좋아하니? 은채야, 너도 이제 네가 어떤 엄마였는지 좀 돌아봐야 하지 않겠어?”
“그래.”
아빠도 다가오더니 엄마의 말을 거들었다.
“아이의 눈은 가장 솔직한 법이야. 다인이 유나를 선택했다는 건 유나가 너보다 엄마 역할에 더 잘 맞는다는 뜻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부모님의 눈에 나는 언제나 틀린 사람이었다.
파티가 끝난 뒤 나는 혼자 자리를 떠났다.
물론 내가 떠나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행복한 예비부부를 둘러싸고 축하하기에 바쁘기 그지없었기에.
집에 돌아온 나는 곧장 서재로 들어가서, 항상 내 곁을 지켜 준 진영숙을 찾았다.
“간호사님,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사모님, 말씀하세요.”
나는 USB 하나를 진영숙에게 건넸다.
“여기에 영상이랑 녹음이 들어 있어요. 내일 아침 8시에 유성진한테 보내 주세요.”
“이건...”
“진실이에요.”
나는 힘없이 웃었다.
“죽은 사람의 마지막 말인데, 그래도 누군가는 들어야 하잖아요.”
나는 편지 몇 통을 더 꺼냈다.
“이건 부모님께 드리고, 이건 다인이에게 주세요. 다인이 성인이 되면 그때 전해주세요.”
“사모님...”
진영숙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할게요.”
나는 금고를 열어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건 엄마 반지예요. 진짜 그 반지예요. 다인이에게 남겨 주세요. 넘기실 때 엄마가 영원히 사랑한다고 했다고 전해주세요.”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이제는 정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불꽃이 화려하게 터지고 있었다. 아마도 유성진과 신유나의 약혼을 축하하는 불꽃놀이였을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게 내 인생의 마지막 밤을 두 사람의 행복을 축하하는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보내고 있네.’
“이제 몇 시간 남았어. 신은채.”
나는 스스로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버티자.”
내일 진실이 밝혀지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내 목숨을 내걸고 저 사람들이 평생 후회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계획한 복수였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이젠 바이.’
그렇게 나는 눈을 스르륵 감았다.
‘남은 평생 동안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너희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했던 바보 같은 여자가 있었다는 걸.’
...
오전 6시.
신은채의 심장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진영숙은 침대 곁에 앉아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차가워진 손을 꼭 잡은 채, 한때 그 누구보다 당당했던 심은채가 조용히 누워 있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오전 8시 정각, 진영숙은 유성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저 진영숙이예요. 사모님이, 사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수화기 너머가 한참 동안 조용했다.
[뭐라고요?]
유성진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롭게 변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파티에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