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삼킨 사랑, 착각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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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후계자 정서준. 그가 오래도록 잊지 못한 여자의 귀국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정서준은 그 여자를 웃게 하려고 임신한 내게 독한 술 한 잔을 억지로 다 마시게 했다. 배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하얀 치마가 피로 물들었다. 그런데도 정서준은 친구들의 부추김 속에서 고급 보양식을 입에 머금고 그 여자에게 입을 맞대 먹여 주느라 바빴다. 의식을 잃어 가던 순간,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지 마. 내가 먹여 살리는 여자일 뿐이야. 나 없으면 살지도 못해." 병원에서 깨어난 나는 어느새 납작해진 배를 어루만졌다. 유산 진단서를 찍어 보내려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런데 정서준의 프로필 사진은 그 여자의 옆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를 일방적으로 차단한 것도 벌써 아흔아홉 번째였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애교를 부리며 풀어 달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그저 3 일 뒤 출국하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Chapters (1)

第1章

재벌가 후계자 정서준. 그가 오래도록 잊지 못한 여자의 귀국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정서준은 그 여자를 웃게 하려고 임신한 내게 독한 술 한 잔을 억지로 다 마시게 했다. 배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하얀 치마가 피로 물들었다. 그런데도 정서준은 친구들의 부추김 속에서 고급 보양식을 입에 머금고 그 여자에게 입을 맞대 먹여 주느라 바빴다. 의식을 잃어 가던 순간,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지 마. 내가 먹여 살리는 여자일 뿐이야. 나 없으면 살지도 못해." 병원에서 깨어난 나는 어느새 납작해진 배를 어루만졌다. 유산 진단서를 찍어 보내려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런데 정서준의 프로필 사진은 그 여자의 옆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를 일방적으로 차단한 것도 벌써 아흔아홉 번째였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애교를 부리며 풀어 달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그저 3 일 뒤 출국하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제1화 집에 들어서자마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흩어진 도자기 조각 사이에 서 있던 최수빈은 나를 보자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더니 울면서 정서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일부러 깬 것도 아닌데, 유나 씨 표정이 너무 무서웠어. 꼭 늙은 마녀 같아서... 나 겁났잖아." 최수빈이 깨뜨린 건 정서준이 처음으로 내게 준 선물이었다. 그 귀한 재벌가 남자가 손수 빚고 구워 준 도자기 인형. 정서준은 안쓰러운 눈으로 최수빈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때 나를 아끼던 모습이 겹쳐 보일 만큼 다정했다. "무서워하지 마. 인형 하나일 뿐인데 뭘. 나도 같이 깨 줄게." 정서준은 몸을 굽혀 인형의 머리를 주워 들더니 바닥에 세게 내리쳤다. 쨍그랑. 파편이 더 잘게 부서졌다. 다시는 붙일 수 없을 만큼. 최수빈은 기분이 풀렸는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가방을 든 내 손은 가늘게 떨렸다. 그 인형을 선물하던 당시 정서준은 제멋대로 내 볼을 움켜쥐었다. 표정에는 한껏 오만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여자한테 이런 걸 만들어 주는 건 처음이야." "이거 망가뜨리면 진짜 더는 안 먹여 살려 준다!" 그랬던 사람이 이번에는 제 손으로 인형을 깨뜨렸다. 하긴, 최수빈을 웃게 하려고 우리 아이까지 버린 사람이었다. 나는 자조하듯 웃으며 빗자루를 집어 들고 파편을 쓸었다. 그때 최수빈이 기침을 한 번 했다. 정서준이 다급히 물었다. "괜찮아? 울다가 목이 쉰 거야?" "유나야, 너 때문에 수빈이가 울었잖아! 얼른 가서 수빈이가 제일 좋아하는 망고 주스 한 잔 짜 와." 믿을 수 없는 말에 손이 멎었다. "나 망고 알레르기 있는 거 잊었어?" 정서준의 얼굴이 굳었다. 찔리는지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하더니, 품에 안긴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데만 열중했다. 나는 파편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마지막 미련까지 함께. 그때 최수빈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럼 나 먼저 갈게. 내일도 호텔에서 기다려. 어제 갔던 데로." 정서준이 반사적으로 나를 보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수빈이랑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냥 옛날 얘기 좀 한 거야. 괜한 생각 하지 마." 거짓말을 들춰내고 싶지도 않았다. 목에 남은 은밀한 잇자국도 못 본 척했다. 최수빈이 수줍게 손을 흔들어 정서준에게 인사했다. 그 순간 손목에 찬 부적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3 년 전, 정서준은 나를 지키려다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었다. 그 팔찌는 내가 절 앞에서 다섯 걸음마다 절을 올려, 이마가 시퍼렇게 멍들고서야 받아 온 것이었다. 깨어난 정서준은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 팔찌 평생 차고 있을게. 우리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 그런데 이제는 그 팔찌마저 제 손으로 다른 여자에게 주었다. 더는 둘의 다정한 작별 인사를 보지 않고 돌아섰다. 출국할 짐을 싸려고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벽 한가운데 걸려 있던 우리 사진이 사라진 게 보였다. 그 자리에는 최수빈의 손글씨 작품이 걸려 있었다. 정서준이 휴대전화에 설정해 둔 글꼴과 똑같았다. 최수빈이 외국에 가 있던 그 몇 년 동안, 정서준은 한순간도 그 여자에 대한 미련을 놓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휴대전화를 켜 3 일 뒤 비행기를 탈 때 울릴 카운트다운 알람을 맞췄다. 그때 인기 검색어 알림이 떴다. [재벌가 후계자 정서준, 연애 예능에 당당히 등장. 재벌가 딸 최수빈과 결혼 임박?] 영상 속 정서준과 최수빈은 서로를 끌어안고 뜨겁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이었다. 내가 유산하고 온종일 병원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안부를 묻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최수빈과 공개적으로 애정을 과시하느라 바빴던 거였다. 지난해 정서준과 여행을 갔다가 파파라치에게 찍혔을 때가 떠올랐다. 나와의 관계를 의심받지 않으려고 정서준은 나를 차단하고 1 개월이나 냉랭하게 굴었다. 제2화 평소에는 그토록 눈에 띄는 일을 피하고 신중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정서준이 잊지 못한 여자 때문에 예능에까지 나갈 줄은 몰랐다. 정서준이 문을 열고 들어와 생각을 끊었다. 입을 열자마자 나무라는 말부터 나왔다. "우리 유나, 유난도 참 심해." "망고 알레르기 좀 있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수빈이는 이제 막 귀국했는데 왜 기분을 망쳐?" 나와 말을 하면서도 정서준은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쉬지 않고 글자를 치는 동안, 눈에 간간이 웃음이 어렸다. 머릿속에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첫 기념일에 정서준이 망고 케이크를 사 왔다. 그 마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아 딱 한 입만 먹었다. 그런데도 알레르기 반응으로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정서준은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나를 안은 손마저 떨렸다. "유나야, 다시는 망고에 손도 못 대게 할게. 앞으로는 조금도 아프게 하지 않을게!" 기억에서 빠져나와 가방을 열고 검사 결과지를 찾았다. "나 유산했어." 그제야 정서준이 나를 쳐다봤다. 돌아온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술 한 잔 마시라고 한 게 다잖아. 질투도 적당히 해야지. 아이를 두고 장난치지 마." 지난밤 나는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배가 아팠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어 절망했는데, 정서준의 눈에는 그저 질투에 눈이 멀어 연기하는 걸로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막 찾아낸 유산 진단서를 건넸다. "정말로 아이 잃었어." "우리 관계도 여기까지야." 헤어지자는 말조차 감히 하지 못했다. 5 년 전 부모님의 회사가 파산했다. 빚을 갚으려고 정서준이 내민 은행 카드를 받았고, 그때부터 그에게 부양받는 여자가 됐다. 5 년을 함께 살고 아이까지 가졌지만, 정식으로 인정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정서준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유산 진단서를 바라봤다. 잠시 뒤 납작한 내 배로 시선을 내리더니, 손을 뻗어 나를 품에 끌어당겼다. 목소리에 미안한 기색이 묻어났다. "마음 아파하지 마. 몸부터 추슬러. 내가 다시 임신하게 해 줄게." 정서준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부드럽게 등을 토닥였다. 예전의 다정했던 사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최수빈만의 치자꽃 향을 모른 척한다면. 가슴이 답답했다. 치미는 메스꺼움을 참고 정서준을 밀어냈다. "정서준 씨, 저 진심이에요." 내가 그토록 거리 두는 호칭을 쓰자 정서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또 억지야! 네가 아직도 예전의 그 귀한 집 딸인 줄 알아? 나 없으면 누가 널 먹여 살려 주겠어?" 맞는 말이었다. 귀하게 떠받들어지던 부잣집 딸은 이제 없었다. 하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살을 맞대고 있던 순간, 정서준은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몇 번이고 약속했었다. "유나야, 네 집안이 기울었어도 나한테 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공주님이야." 나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입술만 떨릴 뿐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제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는지 정서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오해하지 마. 수빈이랑은 그냥 연기하는 거야. 널 버릴 일은 없어." 정서준이 황급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파티에서 그랬던 건 내가 잘못했어. 지금 바로 차단 풀게.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더니 정장 주머니에서 고급스러운 선물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멍해졌다. 함께 쇼핑을 다닐 때마다 보석 매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반지를 몇 번씩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면 정서준은 매정하게 나를 끌어당기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유나야, 나 너한테 충분히 잘해 주고 있어. 이 정도면 만족해야지." 내가 그저 장난감일 뿐이라는 뜻이었다. 예뻐해 줄 수는 있어도, 함께할 미래까지 줄 생각은 없다는. 그런데 지금은... 반지를 바라보며 몸이 굳었다. 정서준이 억지로 내 손을 끌어다가 중지에 반지를 끼우는 대로 내버려 뒀다. 정서준이 불쑥 웃었다. 마치 이겼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거봐, 유나야. 내가 말했잖아. 넌 나 못 떠난다고."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수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유나 씨, 서준이는 정말 보는 눈이 없어요!] [나한테 100억 원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맞춰 줬는데, 보석이 너무 커서 촌스럽지 뭐예요...] [유나 씨가 받은 그 100만 원짜리 사은품이 훨씬 예쁘던데요!] '그랬구나... 사은품이었어.' 최수빈의 속셈은 뻔했다.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제3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서류와 신분증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정서준이 내 뒤에 서 있었다. "여권은 왜 꺼내?" 나도 모르게 손이 움찔했지만, 이내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다음 달에 해외 출장 같이 가잖아요. 챙길 거 미리 확인하는 거예요." 정서준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입을 열었다가 말을 삼켰다. "다음 달에는... 수빈이랑 갈 거야." 내 표정이 싸늘한 걸 보고 정서준이 서둘러 덧붙였다. "대신 넌 다음 달에 유럽 가서 좀 쉬어. 내가 알아볼게. 우리 둘 다 좀 진정할 시간도 갖고." 그래서 갑자기 나를 보내려 했던 거였다. 최수빈과 둘만의 시간을 내가 방해할까 봐. 예전 같았으면 울고 매달리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는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그제야 정서준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다. "가방에 늘 우리 사진 넣고 다녔잖아. 그건 왜 없어?" 곧 끝날 관계였다. 굳이 사진까지 늘 지니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대답하는 대신,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렸다. "저 이제 쉴 건데요. 더 할 말 있어요?" 그제야 정서준은 나를 찾아온 용건을 떠올렸다. "탁자 위에 꿀물은?" 정서준은 위가 좋지 않았다. 의사는 꿀을 좀 더 먹으라고 권했다. 그래서 나는 1 시간마다 뜨거운 물에 꿀을 타고, 식혀서 유리잔에 담아 뒀다. 언제든 따뜻한 꿀물을 마실 수 있도록.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5 년 내내 거르지 않았다. 나는 건성으로 둘러댔다. "막 퇴원해서 몸이 안 좋아요."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유산하고 병원에서 1 일밖에 쉬지 않은 데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가라앉은 탓인지 아랫배가 쑤셨다. 너무 창백한 내 얼굴에 정서준이 당황하더니, 나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너도 참. 우리 아이 하나 제대로 못 지켜 놓고 나한테 화낼 낯은 있어?" "됐다. 오늘 밤은 내가 돌봐 줄게."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무심코 정서준의 휴대전화 화면을 봤다. 발신자 이름은 '내 사랑 수빈'. 전화를 받자 최수빈의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준아, 나 손 다쳤어. 와서 좀 봐 주면 안 돼? 흐으...] [나 너무 바보 같지. 병원 접수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정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난처한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아랫배를 꽉 움켜쥐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를 악문 채 겨우 한마디를 짜냈다. "얼른 가 봐요." 정서준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결정을 내렸다. "미안해, 유나야. 수빈이가 막 귀국해서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네." "일단 의사 불러 줄게. 조금 있다 돌아올게." 몇 초 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마음에는 아무 감각도 남지 않았다. 최수빈 때문에 나를 버려두고 간 건 처음도 아니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잠시 뒤 주치의가 찾아왔다. 의사는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보면서도, 정서준의 지시를 거스를 수는 없었는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진찰했다. "도련님 곁에 5 년이나 있었는데, 도련님은 지인들 앞에서 그 관계를 인정하려 하지도 않잖아요. 설마 잠자리에서 하는 말을 진심이라고 믿을 만큼 어리석은 건 아니겠죠?" "집안에 빚이 그만큼 쌓였는데, 도련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처지잖아요!" "최수빈 씨는 도련님이랑 집안 격이 맞아요. 염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알아서 짐 싸서 꺼져야죠." 의사는 조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은 듯 약을 놓고 곧장 떠났다. 나와 정서준 사이에는 너무 큰 신분의 격차가 있었다. 그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나를 깔봤다. 그래도 나는 정서준이 누구보다 아끼며 먹여 살리던 여자였다. '최수빈이 넌지시 뜻을 내비치고 정서준이 묵인하지 않았다면, 고작 의사가 어떻게 저토록 함부로 굴 수 있었을까?' 조용히 약을 먹자 통증이 차츰 가라앉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의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다 최수빈의 SNS에 새 게시물이 올라온 걸 봤다. [딸기 무늬 밴드보다 더 달콤한 네 사랑.] 사진 속 최수빈은 손가락 끝에 귀여운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정서준은 그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안쓰러워하는 눈빛이 화면 밖으로도 전해질 듯했다. 정서준과 함께한 첫해, 그의 생일이 문득 떠올랐다. 집안일이라곤 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직접 부엌에 들어가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렸다. 뜨거운 기름에 데인 두 손은 빨갛게 부어올랐다. 제4화 그런데 정서준은 별 흥미도 없이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날 밤 내 곁에 머물지도 않았다. 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우연히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를 듣게 됐다. "서유나를 예뻐하는 건 예쁘고 말 잘 들어서야. 고양이처럼 데리고 놀기 좋잖아." "그런데 오늘은 손에 물집이 잔뜩 잡혔더라고. 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해서!" 그때 정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명령조였다. [수빈이가 다음 달에 처음으로 나랑 외국에 가는데 아는 게 없어. 네가 서류 좀 준비해 줘.] 곧이어 전화 너머로 최수빈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난 아무것도 몰라도 서준이가 다 예뻐해 주잖아.] [유나 씨, 내가 좀 성격이 급해요. 오늘 밤 안으로 부탁할게요.] 정서준이 말렸다. [유나는 밤에도 몸이 안 좋다니까. 너무 재촉하지 마...] 하지만 나는 곧바로 수락했다. "알았어요." 5 년 전, 먹고살 길이 막막해 클럽 테라에서 종업원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정서준이 거금을 쓰지 않았다면, 그 느끼한 사장들 사이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 서류까지 정리해 주면 더는 빚진 게 없을 것이다.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몸의 불편함을 참으며 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했다. 꼬박 밤을 새우고서야 시킨 일을 마쳤다. 아침이 되자 서류를 들고 지성그룹으로 갔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나와 정서준의 관계를 알고 있어, 늘 반갑게 맞아 주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서유나 씨, 대표님은 안 계세요. 일단 휴게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걸어가는 내내 직원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이 최수빈 씨 하이힐 신어서 힘들까 봐 차에서 사무실까지 안고 가셨대. 둘이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안내 직원은 난처한 얼굴로 해명하려다가, 내 표정이 달라지지 않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정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류를 사무실로 가져오라는 말이었다. 문을 열자 최수빈이 정서준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끈적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최수빈은 웃으며 서류를 받아 들더니, 책상 위의 죽을 집어 들었다. "유나 씨, 수고했어요. 얼른 먹어 봐요. 서준이가 날 위해 직접 끓인 죽이에요." 나는 놀라 정서준을 바라봤다. 5 년을 같이 살았는데, 최수빈 덕분에 그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받으려고 손을 뻗자 최수빈이 손을 놓았다.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뜨거운 죽이 종아리에 튀었다. 너무 아파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서준아, 유나 씨가 나한테 앙심을 품어서 일부러 데게 한 건가 봐. 그래도 화내지는 마..." 최수빈은 가련하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서준은 황급히 최수빈을 품에 끌어당겨 꼼꼼히 살폈다. 신발만 더러워졌다는 걸 확인하고도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유나야, 얼른 수빈이한테 사과하고 신발 닦아 줘!"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책상 위의 휴지 몇 장을 뽑아 데인 다리를 닦았다. 정서준이 다급하게 내 팔을 움켜잡았다. "돈 대 주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태도야? 내가 먹여 살려 주면 내 말을 들어야지!" 힘이 너무 셌다. 다친 몸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어, 비틀거리며 사무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 계단 앞에 이르러서야 멈춘 정서준은 갑자기 내 팔을 놓았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반동에 뒤로 넘어지면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발목에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정서준은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서유나, 내 말을 거역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미련도 없이 돌아서서 떠났다. 나는 일어설 힘조차 없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들을 수치스럽게 견뎌야 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안내 직원이 휠체어를 밀고 왔다. "서유나 씨, 최수빈 씨가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대표님이 교외로 바람 쐬러 데려가셨어요. 일단 일어나세요." 부축을 받아 휠체어에 앉았다. 마침 출국할 때가 됐음을 알리는 카운트다운 알람이 울렸다. 알람을 끄다가 정서준이 보낸 메시지를 봤다. [그동안 너무 예뻐해 줬더니 네 멋대로 구는구나.] [차단했으니까 네 잘못을 깨달으면 그때 풀어 줄게.] 상관없었다. 내게는 이제 그와의 다음이 없었으니까. 유심을 빼고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그런 다음 휠체어를 돌려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 출국하는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