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번째 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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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신고를 앞두고 결혼 예물을 보러 간 날, 고태준이 갑자기 내 손을 막아섰다. “채원이가 너보다 피부가 하얘서 장신구가 더 잘 어울리잖아. 채원이한테 먼저 착용해 보라고 하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태준은 익숙한 손길로 내 절친 유채원에게 장신구를 하나씩 채워 주었다. 깨끗이 닦고 손으로 따뜻하게 데운 뒤, 조심스레 착용시켜 주기까지. 마치 그런 일을 수없이 해 본 사람처럼 다정했다. 지나가던 부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렇게 자상한 남자친구는 찾아보기도 힘들어요. 아가씨, 꼭 붙잡아요.” 유채원은 수줍은 눈빛으로 고태준을 바라보았다. 두 뺨이 금세 붉어졌다. 고태준은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저 종업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전부 살게요.” 그 과정에서 내 의견은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오늘만 벌써 10번째였다. 고태준이 나 대신 유채원을 앞세운 게. 차에 탈 때는 채원이가 더 날씬해 조수석에 앉아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식을 준비할 때는 채원이가 더 꼼꼼하다며 모든 일을 맡겼다. 웨딩드레스를 고를 때조차 채원이의 안목이 더 좋다는 이유로 내 드레스까지 대신 선택하게 했다. 고태준은 언제나 내 단점을 찾아내 더 완벽한 유채원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했다. 그렇다면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한 이 사랑도 기꺼이 양보해 주리라. 다음 목적지는 구청이었다. 고태준이 내민 손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채원이가 나보다 사진도 잘 받잖아. 기념사진도 채원이랑 찍어.”

Chapters (1)

第1章

혼인신고를 앞두고 결혼 예물을 보러 간 날, 고태준이 갑자기 내 손을 막아섰다. “채원이가 너보다 피부가 하얘서 장신구가 더 잘 어울리잖아. 채원이한테 먼저 착용해 보라고 하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태준은 익숙한 손길로 내 절친 유채원에게 장신구를 하나씩 채워 주었다. 깨끗이 닦고 손으로 따뜻하게 데운 뒤, 조심스레 착용시켜 주기까지. 마치 그런 일을 수없이 해 본 사람처럼 다정했다. 지나가던 부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렇게 자상한 남자친구는 찾아보기도 힘들어요. 아가씨, 꼭 붙잡아요.” 유채원은 수줍은 눈빛으로 고태준을 바라보았다. 두 뺨이 금세 붉어졌다. 고태준은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저 종업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전부 살게요.” 그 과정에서 내 의견은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오늘만 벌써 10번째였다. 고태준이 나 대신 유채원을 앞세운 게. 차에 탈 때는 채원이가 더 날씬해 조수석에 앉아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식을 준비할 때는 채원이가 더 꼼꼼하다며 모든 일을 맡겼다. 웨딩드레스를 고를 때조차 채원이의 안목이 더 좋다는 이유로 내 드레스까지 대신 선택하게 했다. 고태준은 언제나 내 단점을 찾아내 더 완벽한 유채원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했다. 그렇다면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한 이 사랑도 기꺼이 양보해 주리라. 다음 목적지는 구청이었다. 고태준이 내민 손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채원이가 나보다 사진도 잘 받잖아. 기념사진도 채원이랑 찍어.” 제1화 그 말을 들은 고태준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고태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유채원을 한번 바라보더니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너 지금 또 무슨 심술이야?” “이제 결혼할 사람이면 채원이처럼 좀 어른스럽게 굴 수 없어? 결혼 문제를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어른스럽지 못하다. 고태준이 내게 찾아낸 196번째 단점이었다. 우리는 대학 시절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금까지 9년을 사귀었다. 하지만 유채원만 있으면 고태준은 언제나 내가 내 자리를 내줘야 할 이유를 찾아냈다. 유채원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더 많으니 나 대신 자기 친구들 모임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 유채원이 더 활발하니 나 대신 커플 인터뷰에 참여하는 게 낫다고 했다. 영어를 더 잘한다는 이유로, 고태준과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해외 연수 자리까지 유채원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주변 사람들은 고태준과 유채원이 연인인 줄 알았다. 정작 여자친구인 나는 남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숨어 지내야 했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스스로를 바꾸려고 애썼다. 고태준의 차 조수석에 앉고 싶어 억지로 살을 뺐다. 굶다가 위출혈까지 생겼고, 허벅지가 유채원의 팔보다 가늘어질 정도로 말랐다. 그렇게 9년이 지났지만 고태준의 조수석은 여전히 유채원의 자리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누군가를 특별히 아끼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다는걸. 우리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흐르자 유채원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태준아, 화내지 마. 하린이가 배고파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 봐. 혼인신고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일단 밥부터 먹자!” 유채원은 한쪽 팔로 내 팔짱을 끼고 다른 손으로 고태준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우리 셋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태준은 늘 그랬듯 자신과 유채원이 먹을 커플 세트 메뉴부터 주문했다. 그다음에야 내 몫으로 단품 하나를 시켰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어서 나도 고태준과 커플 세트를 먹겠다고 떼를 쓴 적이 있었다. 그때 고태준은 내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았다. “채원이는 너보다 적게 먹으니까 둘이 세트로 시키는 게 더 경제적이야. 네 욕심 때문에 남까지 돈 쓰게 하지 마.” 그 뒤로는 차마 다시 요구하지 못했다. 그러다 나중에 직장 동료와 커플 세트를 한번 주문해 봤다. 고태준은 거짓말을 했다. 세트 메뉴의 양은 단품을 따로 시켰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자기와 커플이 되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속으로 이를 악물고 내가 먼저 커플 세트를 주문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난처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저희 가게 커플 세트는 커플 미션을 성공하면 드리는 서비스인데요. 참여하시겠어요?” 고태준은 표정을 굳힌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유채원이 팔을 툭 치고 나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종업원은 먼저 고태준에게 내 단점 열 가지를 말해 보라고 했다. 고태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소심하고, 충동적이며, 덤벙대고, 예민하며, 이기적...” 고태준은 내 단점을 10개 이상 말했다. 몇십 개 단점이 줄줄이 쏟아졌고, 보다 못한 종업원이 중간에 끊고 나서야 고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유채원이 딱하다는 듯 나를 위로했다. “원래 좀 까다롭잖아. 내 단점을 말하라고 해도 똑같을걸?” 하지만 고태준은 유채원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옆 테이블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까지, 단점 하나를 말하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한 유채원이 웃으며 농담했다. “야, 너 눈이 정말 삐었나 봐. 나 얼굴에 여드름 난 것도 안 보여? 이렇게 확실한 단점이 있잖아.” 그러자 고태준이 불쑥 대답했다. “여드름도 나름 예쁜데.” 순간 모두가 멍하니 굳었다. 곧이어 종업원이 활짝 웃으며 축하했다. “축하드립니다. 두 분은 저희 가게에서 처음으로 사랑하면 단점도 예뻐 보인다는 미션에 성공한 커플이세요. 커플 세트를 서비스로 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들어 고태준을 흘겨보는 척했다.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태준은 내 단점을 하나도 겹치지 않게 몇십 가지나 찾아내면서 유채원의 여드름마저 예쁘다고 했다. 이번에도 내가 졌다. 처참하게 졌다. 제2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누구도 방금 있었던 일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식당을 나왔을 때는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구청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고태준은 시계를 내려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다음부터 고집부릴 거면 때와 장소 좀 가려. 우리도 일부러 쉬는 날 시간 내서 너한테 맞춰 준 거야. 네가 떼쓰는 거 받아 주려고 온 게 아니라고.” “채원이처럼 철 좀 들었으면 정작 해야 할 일도 못 하는 상황은 없었겠지.” 197번째 단점, 철이 없다. 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 조용히 새겼다. 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두 사람의 휴일이지, 내 휴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 밤새워 야근한 끝에 간신히 하루를 쉬게 됐다는 사실을 누가 기억할까. 고태준은 늘 유채원이 계획을 더 잘 세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날짜를 정할 때도 내 의견은 묻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기념일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공항에서 8시간을 기다리며 고태준에게 전화를 108통이나 걸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고태준이 느긋하게 답장을 보내왔다. ‘채원이가 그저께 출발하는 게 더 좋겠다고 해서 우리 그때 이미 다녀왔어. 오늘은 시차 적응 중이야.’ ‘네가 시간이 없었던 걸 누구 탓해?’ 그저께 나는 고태준에게 서프라이즈로 줄 커플 반지를 고르고 있었다. 여행 중에 건네줄 생각이었다. 고태준에게 시간이 있느냐는 연락이 와서 바쁘다고 답했다. 그러자 알겠다는 답장 하나가 왔다. 그렇게 고태준은 내 절친과 함께, 원래 우리 둘이 떠나기로 했던 기념일 여행을 다녀왔다. 나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나는 얄궂은 마음에 반지는 다음 기념일에 선물하자고 생각했다.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알면 후회할 테니까. 하지만 어느새 연애 9년 차가 되었다. 고태준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나와 기념일을 함께 보낸 적이 없었다. 반지 상자는 아직도 여행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아무 말 없는 무덤처럼. 유채원이 고태준의 팔을 툭 때렸다. “우리 하린이한테 그렇게 화내지 마. 혼인신고가 뭐 별거야? 다음에 하면 되지.” 고태준은 사랑스러운 손길로 유채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다음에는 네가 안 오겠다고 할 수도 있잖아. 내가 널 모를 것 같아? 하고 싶은 게 맨날 바뀌면서.” “그럼 나 지금 바다 보러 가고 싶은데, 그것도 돼?” “네가 원한다면야.” 두 사람은 나를 빼놓고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다음 목적지까지 정해 버렸다. 석양 속에서 나란히 바닷가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묻고 싶었다. 우리 둘이 혼인신고를 하는데 대체 왜 유채원이 함께 오고 싶은지까지 확인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고태준이 뭐라고 대답할지 벌써 알 것 같았으니까. ‘아마 198번째 단점은 질투가 심하다는 것이겠지.’ 나는 자조적으로 웃고는 주하영과의 채팅창을 열었다. [부장님, 지난번 말씀하신 5년 해외 파견 승진 제안, 수락하겠습니다.] 곧 대표님은 오케이라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보내왔다. [좋아요. 내일 오후 2시에 공항에서 봐요.] 화면에서 눈을 떼자 멀리서 두 사람이 다정하게 몸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내 자리였던 곳을 유채원이 완전히 차지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유채원의 자리였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멍하니 서 있는데 고태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손짓했다. “하린아, 이리 와.”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기다릴 필요 없다고 소리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은 이미 등을 돌리고 다시 어깨를 맞댄 채 걷고 있었다. 가슴에 가득 차 있던 공기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스르르 새어 나갔다.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더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몸을 돌려 정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9년 동안 제자리에서 기다리기만 했던 바보 같은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저들보다 먼저 날아가고 싶었다. 제3화 나는 신혼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옆 여행 가방을 열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사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내 물건은 많지 않았다. 9년 동안 간직했던 반지 상자마저 쓰레기통에 버리니 가방이 한결 가벼웠고 더 비어 보였다. 막 가방을 닫았을 때 현관에서 전자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유채원 아가씨 납시오! 모두 길을 비켜라!” 바다의 짭조름한 공기와 함께 유채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린아, 왜 먼저 왔으면 왔다고 말을 안 해? 나랑 태준이가 바닷가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나는 유채원의 타박하는 눈길은 무시하고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너 어떻게 들어왔어?” “태준이가 이사 첫날부터 내 지문을 등록해 줬어. 방금 들었지? 나만의 도어록 알림음, 완전 멋있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은 쓸개를 씹은 것보다 더 썼다. 이사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고태준이 내게 준 건 열쇠 한 개가 전부였다. 열쇠를 두고 나온 날이면 고태준이 퇴근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새집에 들어온 첫날부터 고태준은 유채원의 지문을 등록해 두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의 신혼집에 유채원의 전용 알림음까지 설치하다니. 내가 더 묻기도 전에 유채원이 흥분한 얼굴로 오늘 산 예물들을 꺼냈다. “하린아, 태준이는 신경 쓰지 마. 나 대신 생리대 사러 갔어. 우리 먼저 반지나 껴 보자.” 유채원은 내 약지에 금반지를 밀어 넣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채원의 손에만 맞춰 보았던 반지가 내 손가락에 들어갈 리 없었다. 손가락 마디가 쓸려 아파서 나도 모르게 유채원의 손을 쳐 냈다. 유채원은 비틀거리다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결국 우리 둘 다 바닥으로 넘어졌다. 유채원은 엉덩방아를 찧었고, 나는 이마를 부딪쳐 피부가 찢어졌다. 그때 고태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다급한 나머지 목소리까지 갈라졌다. “심하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고태준은 달려와 유채원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예전에 내가 넘어져 도와 달라고 하면 고태준은 유채원처럼 혼자서도 잘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유채원이 넘어지자 조금이라도 아플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유채원에게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고태준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너 언제부터 이렇게 못돼먹었어? 채원이가 좋은 마음으로 반지를 껴 주려는데 왜 밀어? 어서 채원이한테 사과해.” 199번째 단점, 못돼 먹었다. 피가 눈앞을 가려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유채원은 엉덩이를 감싸 쥔 채 손사래를 쳤다. “하린이 잘못 아니야. 내가 피곤해서 발을 헛디뎠어.” 유채원은 괜찮다는 걸 보여 주려는 듯 몸을 일으키다가, 갑자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배를 움켜쥐었다. 고태준은 황급히 유채원을 안아 들었다. “병원 가자!” 유채원은 그저 생리통이라고 우겼지만 이번만큼은 고태준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차 열쇠를 집어 들고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울먹이며 불렀다. “고태준! 나 피 나.” 고태준은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피로 젖은 내 얼굴 반쪽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유채원이 아픈 신음을 내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급차 불러 줄게. 하지만 채원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 혼인신고는 없던 일로 해.” 제4화 끝내 고태준은 구급차도 불러주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도 헛된 기대를 품었다. 내가 유채원에게 사과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고태준이 구급차 한 대쯤은 불러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고태준은 그러지 않았다. 한밤중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핏자국은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직접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갔다. 응급실 의사는 내 상처를 치료하면서 혀를 찼다. “이제 나이도 적지 않으신데 남자친구라도 사귀어야죠. 그렇지 않으면 한밤중에 다치면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잖아요.” “아까도 어떤 여자가 생리통 때문에 왔는데, 남자친구가 공주님처럼 안고 응급실 침대까지 데려다주더라고요. 의사들한테 제대로 치료 못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면서 의사 면허까지 들먹였다니까요.”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몰랐다. 내게도 남자친구가 있고, 하마터면 결혼까지 할 뻔했다는 사실을. 다만 내 약혼자는 다친 나를 한밤중에 내버려 둔 채 다른 여자의 기사가 되러 갔을 뿐이었다. 나는 이마를 다섯 바늘 꿰맨 뒤 병원 로비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침 첫 환자들이 몰려들 무렵, 나는 쑤시는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단란한 세 식구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유채원은 소파에 앉아 대추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고태준은 그 옆에 바짝 붙어 커다란 손으로 유채원의 배를 문질러 주었다. 예비 시어머니 김명희는 기운을 보충하라며 따뜻한 반찬을 한 상 차려 놓고 유채원의 그릇에 국을 가득 담아 주었다. 안색은 어떤지, 배는 괜찮은지 연신 묻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순간, 김명희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금세 차갑게 굳었다. “대체 낯짝도 얼마나 두꺼우면 내 귀한 수양딸을 다치게 해 놓고도 다시 기어들어 와?” 김명희는 유채원을 유난히 아꼈다. 며느리보다 더 귀한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며느리가 될 사람이었기에 유채원은 수양딸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명희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김명희는 비웃으며 가방에서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드라이버, 스패너, 펜치, 망치, 파이프 렌치. “우리 채원이가 골라 준 패물이 그렇게 싫어? 그럼 네 함엔 이런 쇠붙이나 담아 보내 주마!” 나는 옆에 있는 고태준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고태준은 유채원의 배를 문질러 주던 손을 잠깐 멈췄다. 하지만 김명희를 말리지 않았다. “넌 채원이한테 사과해야 해.” 나는 웃음이 났다. 쓴웃음이었다.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고태준이 내내 방관하고 감싸 주지 않았다면 김명희도 나를 이토록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태준은 내가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하든, 김명희가 얼마나 심하게 괴롭히든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니 김명희도 아들이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갈수록 더 심하게 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는 더 참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공구 다섯 개를 김명희 쪽으로 밀어 놓았다. “김 여사님,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 결혼 안 할 거니까요.” 고태준은 김 여사님이라는 호칭에 발끈한 듯했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뒤의 말은 또 심술을 부리는 거라고 여겼는지 아예 듣지도 않았다. “심하린, 너 언제부터 이렇게 어른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됐어? 어른을 제대로 부르는 게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야?” 그렇다면 김명희는 나를 언제 존중해 준 적이 있었던가? 나를 제대로 불러 준 적은? 김명희는 늘 내 이름만 불렀다. 며느리라고 불러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면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날 나는 참으면 언젠가 달라질 거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내 가장 큰 착각이었다. 오늘부로 고태준이 찾아낸 내 단점은 벌써 200개에 달했다. 이번에는 버릇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또 내가 고개를 숙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도 없었다.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고태준이라는 진흙탕에서 이미 200번 넘게 허우적거렸다. 이제는 빠져나올 때였다. 나는 고태준의 굳은 얼굴은 신경 쓰지 않고 신혼집 열쇠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후 김명희의 발치에 있던 여행 가방을 꺼내 들었다. “고태준, 우리 헤어지자.” 고태준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열쇠를 보던 시선이 여행 가방으로 옮겨 갔다가 내 얼굴에 멈췄다. 그러더니 뭔가 알아챈 사람처럼 비웃었다. “밀당도 정도껏 해, 심하린. 너 이제 서른이야. 그런 수작은 안 통해. 넌 하나부터 열까지 채원이만 못하잖아. 나 아니면 누가 네 그 많은 단점을 받아 주겠어?” 나는 문으로 향하던 걸음을 잠깐 멈추고 한마디만 남겼다. “그럼 그렇게 완벽한 유채원이랑 결혼해. 이제 나 좀 놔줘.” 등 뒤에서 고태준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외쳤다. “가라 그래. 채원아, 넌 안방으로 들어가. 상관없는 사람 따위 신경 쓰지 마!” 나는 더 듣지 않고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아 공항으로 향했다. 휴대전화가 두 번 울렸다. 유채원이 조금만 참으라며 다음 주에 혼인신고를 하러 가자는 메시지였다. 또 유채원과 고태준이 마음대로 정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억지로 야근을 몰아 하며 휴가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나만의 새로운 삶이 기다리는 곳으로 날아갔다. 일주일 뒤, 고태준은 일부러 약속보다 30분 늦게 구청에 도착했다. 그동안 심하린에게 심한 말을 한 걸 후회하기는 했다. 유채원에게도 안방에서 나가라고 했다. 하지만 심하린이 며칠째 먼저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것이 더 화가 났다. 마치 정말로 헤어진 사람처럼 구니까. 고태준은 차 안에서 짜증스럽게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났다. 아직도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이 지났다. 일부러 기선 제압한다고 여겼다. 세 시간이 지나자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네 시간이 흐르고서야 더는 참지 못하고 심하린과 친한 직장 동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곧 답장이 왔다. [하린이요? 승진해서 5년짜리 해외 파견 프로젝트 맡으러 갔잖아요? 남자친구인데 그것도 모르세요?]